이해하는 일에 대하여
사십 대가 되며 과거에는 이해 안 됐던 것들에 대한 해답이 몸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가령 ‘왜 부모님들은 늘 가던 곳만 갈까?’, ‘기어코 한번 모시고 가야지 그다음부터 새로운 곳으로 다니시는 걸까?’와 같은 의문들에 대한 깨달음.
정답인지는 모르겠다. 멀다면 먼 남에 나라에 와 있으니 느껴지는 바가 있다. 아마도 그건 ‘이 나이 들어서 바보 같아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 혹은 ‘자존감을 지키려는 방어기제’ 쯤으로 해석된다. 새로운 곳은 낯설다. 잘 모르는 언어가 가득 찬 공간에 그곳을 익숙하게 이용하는 다수가 차 있다면, 나 역시 그곳에 들어가는 것이 두렵게 느껴진다. 이 나이 먹고 식사 메뉴 하나 잘 못 시키는 바보 같은 모습을 들킬까 봐 두렵다. 잘 모르는 ‘언어’라고 했지만 언어가 비단 언어 그 자체에 국한된 것만은 아닐 것이다. 부모님들은 타국에서 내가 느끼고 있는 그것처럼 생경한 언어의 공간들이 늘 두려울 것이다. 그곳이 비록 자신이 나고 수십 년간 자란 모국이라도 말이다. 한국은 그만큼 빠르게 변하고 빠르게 버린다. 새로운 언어를 습득하고 적응해 갈 여유 따윈 없는 ‘최고효율지상주의’. 웃을 일이 아니다. 다음으로 바보 같아 보일 사람은 나, 그다음은 너다.
이제는 더 이해하고 싶어진다. 왜 그러시는 걸까. 머지않은 미래에 나는 왜 그러고 있게 될까.
시부모님을 모시고 해외여행을 온 착한 부부가 있다. 며느리는 늘 그랬듯 좋은 곳을 찾아 함께 즐기고 싶어 했다. 시아버지는 타국의 생경한 음식들이 마뜩잖았고, 한국에서는 한 병에 3천 원 남짓 하는 소주를 8천 원을 들여 매 끼니 마셨다. 싸웠고, 돌아와서는 수년간 의절 비슷한 걸 했다고 한다. 명절 때는 아이만 시댁에 보냈다. 물론, 많은 생략이 있으나 내가 이해해보고 싶은 건 왜 소주가 트리거가 되었을까. 시아버지는 생경한 타지에서 두려웠을까. 스스로 바보 같아 보인다고 생각했을까. 그래서 익숙한 소주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을까. 그런 마음을 몰라주는 며느리와 아들에게 서운했을까. 물론 그렇다고 시아버지의 그런 행동이 타당하다고 보진 않는다.
두려움은 공평하게 다가온다. 젊을 때는 모르는 것을 드러내는 게 전혀 두렵지 않았다. 세상은 헤매는 만큼 내 땅이었다. 마흔이 되고 나니 그렇지 않게 느낀다. 누가 뭐라 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무슨 소릴 하고 싶었던 걸까. 그래, 아마도 “그러니까 서로 좀 더 이해하려 노력해 봅시다 “ 같은 꼰대 같은 말을 하고 싶었나 보다. 아니다. 그냥 “나는 지금 밥집에 들어가는 것조차 두렵다”를 에둘러 포장한 것이다. 마흔을 맞는 마음은 서른보다 쉽지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