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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두연 Jan 07. 2021

[감상-소설] 최은영의 언니, 나의 작은, 순애언니



아직 서울에 살고 있을 무렵, 단순 사무직 아르바이트를 할 때이다. 엑셀 창을 켜놓고 쉴 새 없이 숫자들을 입력하는 일을 해야 했는데 무슨 환경 사업과 관련된 일이라나 뭐라나. 나에게는 그저 하루 최저시급 6만 원 남짓한 돈을 받기 위한 악착같은 일에 불과한 작업이었다.


단순 노동이란 유독 이상하게 시간이 더디게 흘러간다. 숫자들을 입력하는 와중에도 시간을 참아내기가 괴롭기 그지없어 한 가지 방법을 찾아냈다. 바로 김영하 작가의 지난 팟캐스트를 듣는 것이었다.

김영하 작가의 팟캐스트를 처음 접한 것은 대학교 3년 때이다. 아마도 고전 문학을 읽는 시간이었던 것 같은데 교수님께서 여러분은 이런 걸 들어본 적이 있느냐며 그의 팟캐스트를 들려주었다. 그의 팟캐스트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잘 알 듯, 책을 읽어주는 콘텐츠이다. 본인이 쓴 소설도 읽고 다른 작가가 쓴 소설도 읽는다.

그때 그의 음독을 들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허공을 바라만 보아도 귀에 들려오는 무궁한 이야기에 내 뇌 속은 온갖 장면들을 보고 느꼈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제목이 마음에 드는 작품을 골랐다. 바로 최은영 작가의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라는 작품이다.


이상하게도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나 작품 속 시대가 맞이한 주요 사건들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완전한 기억은 아니지만 빨갱이 이야기가 나왔던 것 같기도 하고 그와 관련해 순애의 남편이 싸늘하게 죽었다는 정도로만 기억한다. 아마도 내가 빠져든 것은 소설 속 해옥이 순애를 바라보며 느끼는 감정과 순애가 맞이한 불운과 가난이 한 데 뒤엉킨 비극 같은 것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노인들이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과 같이, 가난을 가진 자들 또한 그러하다. 과거의 무해했던 지난날들에 대한 이야기. 자신의 딱한 사정을 토로하는 이야기들 말이다. 해옥은 자신의 생활이 안정되어 갈수록 순애가 부담스러웠고 부담스러운 그녀의 이야기를 더는 듣고 싶지 않아 했다. 후에 순애의 집에 통닭을 사들고 찾아가서도 오래 굶은 사람처럼 고기를 씹는 언니의 모습과 아픈 형부의 오줌이 자신의 원피스에 젖어들었을 때, 순애는 그저 그 집이 싫었다고 한다. 무언가를 먹을 때 항상 자신보다 남을 먼저 챙기던 언니가 자신의 아이도 내팽개치고 닭고기를 입에 욱여넣을 때부터, 지 아비에게 닭고기를 뜯어 가져다주는 조카의 모습이 순애의 어린날과 겹쳐 보이는 것에서부터. 순애 언니, 나는 언니가 싫고, 언니의 집이 싫고, 언니의 모든 것들이 싫어라고.


서울에 처음 올라가 집을 구해서 살고 있을 무렵. 나는 가난이란 이 빌라에 무식하게 지어진 계단 같다고 생각했다. 모양새가 함부로이고 거미가 떠난 거미줄이 너덜거리는 계단. 그 계단을 밟고 집에 들어서야만 하는 내 불쌍한 몸뚱이. 그때의 나는 매일 마음에 멍이 들어있었고 옥상 바닥에 침을 뱉으며 담배를 폈다. 나는 이 집이 싫고, 쓰레기를 모으는 옆 집 할머니가 싫어, 월세살이하며 살아가는 것이 싫어, 깨끗하지 못한 벽지와 결로가 생기는 벽이 싫어, 거지같이 사는 게 싫어.


시대에 흐름 속 하향 곡선에 몸이 끼어버린 이들. 쪼개진 나라가 가진 비극은 지긋지긋하게 대물림되고 가난의 그림자라도 밟아본 사람은 그것에 진저리가 나게 되어있다. 어쨌거나 그 구역 안으로 손가락 하나 걸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언니야.”

  “너 보고 싶어 날아왔지.”

  “날개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날아오나.”

  “없기는. 이거 봐라.”

  이모는 등에서 둥그런 부채 모양의 하얀 날개를 펼치더니 8인용 병실 천장 위를 뱅글뱅글 날아다녔다.

  엄마는 날아다니는 이모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 모습이 꽤나 우스워서 애처럼 웃었다.

  그러자 이모도 만족한 듯이 날개를 접고 바닥으로 내려왔다.   


작가는 순애에게 날개를 선물하고 날개를 받은 순애는 보란 듯이 날아다닌다. 비록 좁디좁은 8인실 병실이지만 그녀는 난다. 도입부에 나오는 이 날개 이야기가 아니었다면 끝끝내 위안을 얻지 못했을 것 같다. 개인이 감당해야 했던, 개인이 감당하고 있는 그릇된 선택에 대한 벌. 그래도 잊지말아야 하는 사실이 있다.

"해옥아 기억해. 아무도 우리를 죽일 수 없어". 날개를 접은 순애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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