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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이네 Feb 28. 2022

물티슈가 말을 하네, 그땐 그랬지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몇 년 만에 다시 시작한 글쓰기 모임 첫날. 모임을 진행하시는 작가님은 자기소개를 하던 중, 작은 듯 단단한 듯 조금은 아련한 목소리로 자신의 과거를 회상했다. 그는 경찰 공무원이 되기 위해 몇 년을 노량진에서 계절도 없이 살았다고 한다.


"저는 그때를 생각하면 제 자신이 물티슈 같아요"


작가님의 이 울적한 소개말은 마법 주문처럼 나를 2018년 여름으로 데려다 놓았다. 그해 여름, 씻을 때를 빼고는 일주일에 7일을 작업실에 박혀 지냈다. 라꾸라꾸는 잠을 잘수록 몸이 자꾸자꾸 구겨져서 라꾸라꾸인가. 그때 나는 그림 작가가 될 줄 알았다. '그냥 열심히'만 하면 보상처럼 작업이 팔리고, 전시도 하는 건 줄 알았다. 그런데 '그냥 열심히'는 결과를 보장하지 않더라. 다만 ‘열심’을 불태우고 까맣게 꺼져버린 내가 있었을 뿐. 분명 남부끄럽지 않게 노력했음에도 항상 부끄러웠고, 딱히 잘못한 건 없는데 잘한 것도 그다지 없어서 그저 '내 탓이지... 내 탓이지...' 염불을 읊듯 자책과 우울을 오갔다.


저 멀리 아무도 없는 곳으로 사라지고 싶었다. 자전거를 충동구매했다. 자전거 판매자는 기껏해야 고등학생 정도로 보였는데, 여자 친구와의 100일 기념일 선물을 사주기 위해 자전거를 판다고 설명했다. 우울한 와중에도 판매자 소년의 갑작스러운 TMI가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자전거에 올라 페달을 밟았다. 그렇게 자전거를 타고 한강을 달리기 시작했다.


'아 여름 냄새'


무르익은 여름이었다. 틱틱. 내리막을 달리자 얼굴을 때리는 날벌레까지. 완벽하게 여름이구나. 뺨을 타고 땀이 뚝 떨어진다. 풍선처럼 부푼 티셔츠 안으로 바람이 불어와 시원하게 훑고 지나갔다.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은 젖은 수건 같구나. 방구석에 버려둬서 꿉꿉한 냄새가 풍길 것만 같은, 눅눅한 수건 같다.'


그래서 여름 바람과 햇살에 나를 털어내고 젖은 마음을 바짝 말려야만 했다. 다시 뽀송한 수건이 되어 제 역할을 다 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지.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다리에 힘을 주고 다시 한번 바퀴를 굴린다. 주르륵 마음을 짜낸다.


작업실로 돌아와 늘 하던 대로 작업을 했다. 이번에는 상하이로 간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신청한 페어였다. 이제는 멈춰야 할 때임을 확인하는 이별여행을 준비하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더 악착같이 열심히 준비했다. 사실 한편으로는 아직은 기회가 있다는 희망을 보고 싶었다. 내가 갖고 있는 것 중 제일 큰 캐리어 가득, 준비한 그림과 토이박스를 꾹꾹 눌러 담았다. 상하이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도 캐리어는 여전히 가득 차 있었다. 그 사이 어디에도 기대했던 희망은 담지 못하고 터덜터덜 집으로 향했다.


2년간 사용하던 작업실을 정리했다. 당장 먹고사는 궁리를 해야 했기 때문에 적당히 회사에 들어갔다. 회사쯤이야 언제든 그만두고 작업을 다시 할 줄 알았는데 벌써 4년 차 직장인이 되었다. 솔직히 꼬박꼬박 월급 생활이 달다. 서른이 넘었어도 진로는 여전히 고민이다.


그래도 슬슬 글을 써볼 마음이 들어서 참여한 모임이었다. 그림 작가와 공무원. 어쩌면 전혀 다른 모양의 삶을 꿈꾸며 살았던 두 사람인데, 과거에 대한 소감이 닮아 있음이 반가웠다. 한편으로 위안도 된다. 그도 물티슈 시절을 지나왔기에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글을 쓰는 작가가 되지 않았나. 어느 영화의 제목처럼 인생은,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눅눅한 그날들이 '그때'가 되는 ‘지금’이 올 것이다. 그래서 나는 또 속는 셈 치고 '그냥 열심히' 하루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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