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새옹지마
당인동 적벽 빌라에 살던 시절, 주차 난이도가 상당했다. 들어가는 골목도 좁았지만 빌라와 빌라 사이 좁은 공간 모퉁이에는 못 박힌 쇠기둥이 떡하니 박혀있었다. 운전 연수 n일차 초보인 나는 주차를 할 때마다 진땀을 빼야 했다. 차를 어떻게 넣어도 쇠기둥의 못이 옆구리에 툭 하고 걸리는 통에 차에도 마음에도 부우욱 하고 흠집이 났다. 하지만 연습만이 살길이라고 했었나, 시간이 지날수록 주차에 자신이 붙었다. 이미 차 껍데기가 너덜너덜해져서 마음이 편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유야 어찌 됐건 후방 카메라도 없고, 후방 센서도 고장 난 악조건 속에서 매일 몇 번씩 주차 훈련을 한 덕에 웬만한 주차는 당황하지 않고 하게 되었다.
운전에 자신이 붙어 주말에는 꽤 멀리까지 드라이브를 다녔다. 웬만한 도로는 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할 때쯤 새롭게 당황스러운 길이 나타나곤 했다. 그날 찾아간 카페가 그랬다. 정말 차로 갈 수 있는 경사일까 의문스러운 각도. 눈이 내려 길이 얼면 언덕 위에서 쇠사슬을 내려주던 나의 고등학교가 기억 저편에서 떠올랐다. 엑셀을 밟아도 제대로 올라가지를 못하는 늙은 소나타를 보고 있자니 어디서 쇠사슬이라도 내려주고 싶었다. 그래도 저 위에 줄줄이 차들이 주차되어 있는 걸 보면 올라갈 수 있는거겠지. 애써 올라온 주차장은 더 가관이었다. 여전한 언덕 각도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빼곡히 주차된 차들 사이에 끼어들어가야 했다. 다행히 카페에는 주차를 도와주시는 아저씨가 계셨다. 초보 딱지를 두 개나 붙이고 헤매는 나를 발견한 아저씨는 창문을 조심스레 두드리셨다. 아저씨는 책으로 배운 것 같이 굉장히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운전이 미숙하시면 도움을 드려도 괜찮을까요?” 하고 말했다. 그 방긋한 웃음이 왠지 모르게 싸했지만 언덕을 올라오느라 이미 진을 다 빼버렸다. 게다가 도움을 준다는데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어서 아저씨에게 운전대를 맡겼다. 자신 있게 차를 뒤로 U턴을 돌리는 발렛파킹 아저씨. 저 각도로, 저 속도로 엑셀을 밟으면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슈웅 쾅! 주변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턱이 땅으로 떨어질 듯 입이 떡 벌어졌다. 난간 위로 1/4 정도 올라간 차는 엉덩이가 찌그러진 것은 물론 타이어까지도 못에 걸려 너덜너덜 거리고 있었다. 그 튼튼한 타이어가 저 정도로 찢어질 수 있구나.
놀란 카페 사장님이 뛰어나왔다. 발렛파킹 아저씨는 사과도 없이 어디론가 꽁무니를 빼고 사라져 있었다. 괘씸하고 어이가 없었지만 너무 황당해서 웃음이 났다. 화를 내기는커녕 껄껄 웃고 있는 나를 보고 카페 사장님은 어찌할 바를 몰라하셨다. 사장님은 연신 사과를 하며, 집으로 돌아갈 차 렌트부터 모든 수리 비용, 빵과 음료를 제공해 주셨다. 자영업은 정말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이 상황에 커피랑 빵을 먹는 게 맞는지 혼란스러웠지만, 일산에서 양평까지 왔는데 차수리만 맡기고 집으로 갈 수는 없어서 자리에 앉았다.
황당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가만 생각해 보니, 발렛파킹 아저씨가 찢어버린 타이어는 얼마 전 펑크가 나서 때워둔 쪽이었다. 일그러진 뒷범퍼와 트렁크도 사실은 주차 연습으로 이미 너덜너덜했었고, 집에 갈 때 나는 신형 소나타를 타게 되지 않았나. 다 같이 외쳐. 오히려 좋아. 사장님의 나이스 한 대처 덕분에 어쩐지 나는 손도 안 대고 코를 풀었다. 인생은 알 수가 없다며 함께 온 친구와 커피잔으로 짠을 했다. 돌아가는 길, 아까는 어디에 숨어 보이지 않던 발레파킹 아저씨가 안내봉을 들고 나가는 차들을 안내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아저씨는 아까 그 방긋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꾸벅 인사를 했다.
나쁜 일이 생기지 않으면 더 좋겠지만, 인생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벼락치기로 알아가는 중이다. 작년부터 끊임없이 사건 사고가 났던지라 이 정도 사고처리는 너무 간단해졌다. 웃프게도 웬만한 일에는 당황하지 않을 만큼의 짬과 내성이 생겼다. 나이를 먹을수록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다고 인정하는 순간들이 잦아진다. 인생은 새옹지마. 일어나는 일 들이 화가 될지 복이 될지는 눈앞의 결과만으로 알 수가 없는 법. 그렇게 나는 또 초연 해지는 법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