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을 떠나던 날, 내 마음속의 장마는 시작되었지만 곧 그치겠지.
보내줄게~ 니가 지치지 않게... 보내줄게~ 우리란 울타리 밖에... 나를 떠나면 두 번다시.. 내게 또다시 돌아오지 않을 걸 알아.. 알면서도 널 붙잡을 수가 없는 바보같은 내가 화가 나 그래서 계속 눈물이 나.. 넌 나의 태양, 네가 떠나고 내 눈엔 항상 비가와.. 끝이 없는 장마의 시작이었나봐.. 이 비가 멈추질 않아.
스웨덴이 내게 말하는 것만 같았던
-정인, 장마
2018.06.13(수). 스웨덴은 나를 보내주었고, 나는 그 이별을 받아들였다. 나는 내가 오랫도록 동경했고 사랑하던 그리고 여전히 사랑하는 스웨덴이라는 나라와 그리고 그 곳에서 만난 소중한 사람들과 이별했다. 그리고 길다면 길었던, 하지만 너무나도 짧았던, 스웨덴에서의 유학생활을 정리하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헤이스웨덴(Hej Sweden)', 안녕 스웨덴을 외치며 설렘을 가득안고 스웨덴으로 떠난 이년 여만에 '헤이도 스웨덴(Hejdå Sweden)', 헤어짐의 안녕이라는 인사를 건넸다. 언제 다시 만날 지 기약없지만 다시 보자는 인사를 한 자 한 자에 힘을 실어 건네며... 스톡홀름에서 베이징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리고 비행기 안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한국에선 이제야 장마가 시작되었지만 내 마음속의 장마는 그 날부터 여전히 진행중이다. 북유럽에서 살고 싶다는 막연한 이상을 실현시켜준 그 곳, 생애 첫 오로라, 겨울 내내 긴 어둠 그리고 여름 내내 해가 지지 않는 아름다운 백야, 숲이 주는 생명력을 깨닫게 해주고, 촛불의 은은함과 따뜻함을 처음으로 알려준 나라. 때로는 너무도 지루하기도 심심하기도 했지만 인생에서 가장 많은 처음을 경험하게 해준 곳을 나는 떠나 그리던 고국, 한국으로 돌아왔다. 나는 왜 내가 그렇게 동경하던 그리고 살고 싶었던 스웨덴을 떠나 한국으로 돌아오기로 했을까?
내 삶의 목표는 스웨덴에서 사는 건 줄 알았는데..
우리 모두에겐 꿈이 있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으며 각자가 그리는 삶의 모습이 있다. 나 역시도 행복한 삶을 쟁취하기 위해 늘 고민하고 행동하고자 노력했는데, 사실 돌이켜 보면 유학을 오기 전 나는 행복에 대한 정의를 내리지 못했었다. 오히려 남들이 또는 내가 속한 사회의 불행에만 귀를 기울였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사실 불행하지 않았었는데.. 자신의 삶없이 가족들을 위해 일하다 돌아가신 아빠를 보내드리고, 어렵게 취업한 후에도 힘들어하는 친구들과 쌓여만 가는 헬조선에 대한 사람들의 불평불만을 보며 내가 속한 사회에 대한 두려움이 커졌고 취업 후의 삶이 두려웠었다. 그 속에서 나는 행복을 찾지 못할까봐. 그 두려움은 현실에 발을 들이기도 전에 힘든 이 사회를 탈출해야겠다는 절박함으로 이어졌고, 대학 초때 부터 가장 행복한 나라들이 모여있다는 북유럽에서의 삶을 꿈꾸게 했다. 감사히도 석사 프로그램을 통해 장학금까지 받아가며 스웨덴에서의 정착을 생각하며 이주했지만, 지난 2년 간의 유학 생활동안 깨달은 것은 내 삶의 목표가 스웨덴에서 사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왜?에 대한 나의 변론
개인적으로 나에게는 어떤 일을 하느냐가 굉장히 중요했고, 현재 내가 관심있는 분야인 한국 문화 홍보나 한식과 관련한 일을 하기에는 한국에 더 기회가 많을거라 생각했다. 스웨덴에서도 기회를 만들까 고민을 많이하고 상담도 받았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어떤 조직이나 누군가로부터의 배움과 경험이 더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어리석게도 스웨덴에 살면 모든 것이 마음 편하고, 행복하고, 걱정없이 살 줄 알았다. 하지만 그 곳 또한 또 다른 현실이었으며, 외국인으로서 내가 원하는 분야에서 취업이 쉬워 보이지 않기도 했고(나는 스웨덴에서 제대로 구직을 해보지는 않았음을 밝힌다. 주변 사람들의 취업 준비를 지켜보았을 뿐), 내게 있어 나의 관심사와 내가 현재 지닌 역량을 조화시켜 내가 더 많이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은 한국이라고 느꼈다(이 또한 겪어봐야겠지만).또한, 개인적으로 나는 여유롭고 안정적인 환경보다 좀 더 북적북적되고, 다양한 문화 생활을 손 쉽게 즐길 수 있고, 바쁜 대도시의 삶을 선호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삶이 피로해서 도망친 스웨덴이지만 지금의 나는 아직 바쁘고 정신없고 다양한 사람들과 상호작용 할 수 있는 기회를 좇는 사람임을 깨달은 것이다. 사실 여전히 복지, 타인에 대한 관용 및 개성을 존중하는 문화, 일과 삶의 균형 등 여러 측면에서 여전히 스웨덴은 살기 좋은 나라라고 생각하지만, 자기 합리화가 섞인 자아 성찰 결과 스웨덴은 '현재'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님을 깨달았다. 또한 스웨덴에 살면서 새로운 시각으로 한국을 보게 되었는데, 한국의 역동성, 문화 파워, 한국인의 근성 그리고 변화를 일궈내고자 하는 일련의 노력들을 보면서 조금더 나은 미래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꼈고, 나도 도피하기보다 관점을 바꿔보고, 변화에 일조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갈지언정 우리의 시간은 거꾸로 가지 않는다
참으로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를 올바르게 정립하는 건 어렵다. 나는 자식은 성인이 되는 순간 하루 빨리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부모는 부모대로 노후에 자신의 시간을 보내고, 자식은 자식대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것이 부모자식간의 올바른 관계라 생각했다. 부모와 자식 모두 대등한 인간으로서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희생없이. 그래서 만 18세가 되면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자신만의 삶을 꾸려나가는 서양 국가의 문화를 늘 부러워했고 내 삶에서 실천하고 싶었다. 특히나 한국에서는 부모가 자식에게 자신의 욕망을 주입하거나 지나친 사랑과 걱정으로 자식의 독립을 방해하고 늘 부모의 울타리에 가두려고 하는 경우가 흔했기 때문에, 부모로부터 나조차도 얼른 물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싶었다. 우리 부모님은 사실 당신이 배운 게 없다시며 대부분 나의 결정을 존중해주셨지만 지나친 걱정으로 인해 종종 사소한 갈등이 발생했고 나는 이를 간섭으로 여기곤 했다. 그런데 사실 대학 입학 후 줄곧 물리적으로는 독립했으나 경제적으로는 늘 부모님께 많이 의존해왔다. 장학금과 아르바이트로 조금의 수입을 올린다해도 대부분은 부모님의 경제적 지원 사격을 입어 대학 및 유학 생활을 끝냈다. 내가 생각하는 부모 자식간의 관계가 주도적인 삶을 위해 하루빨리 자식이 독립하고 부모는 부모대로 삶을 보내는 것이었지만, 나는 이미 부모로부터 너무 많이 받은 것이었다. 경험상 유럽 서양권(스웨덴, 독일, 핀란드, 덴마크, 프랑스, 벨기에 등 모든 유럽 국가 상황은 상이함) 에서 온 많은 친구들은 정부로부터 받는 보조금과 아르바이트 월급으로 생활비를 충당하며 일찍이 부모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교육은 대부분 무료거나 소액의 학생회비를 내는 전부기에 자식의 경제적 독립이 조금 더 수월했던 것이다. 때문에 그들과 부모간의 관계는 우리의 관계와 많이 달랐다. 하지만 내가 자라온 환경에서 내가 생각했던 올바른 방법은 이상적이지만 많이 이기적이었음을 깨달았다. 더군다나 자식을 위해 당신의 삶을 희생하며 긴 세월을 보낸 엄마의 삶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면서...
특히 내게는 어머니만 계시기에 엄마의 보살핌에 보답하는 방법은 지금 당장 경제적으로 보답하지는 못할지언정 엄마와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라 느꼈다. 한 해 한 해 조금씩 늘어가는 엄마의 주름살을 볼 때나 엄마가 더 작아지는 것만 같을 때 내 결심은 더욱 견고해졌다. 특히 이 결심은 지난 4월 엄마와 동생과 함께 유럽 여행을 하면서 굳혀졌다. 처음하는 유럽 여행동안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여기저기 걸어다니며 아이처럼 설레하는 엄마의 모습과, 자식들과 함께 3주 간의 긴 여행을 하면서 오랜만에 느낀다던 북적거림이 좋다는 엄마. 단촐한 세 식구일뿐이지만 엄마에겐 그게 큰 행복임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언젠가 나도 가정을 꾸리게 되면 또 다시 엄마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지 않을텐데,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내가 엄마의 외로움을 달래주고 싶었고, 이는 한국행을 결심하는 데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헬조선, 헤이(안녕)조선
이런 연유로 나는 스웨덴을 떠나 한국으로 돌아왔다. 어떤 이들에게는 여전히 헬조선일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내게는 반가운 고국이고, 내가 사랑하는 고국이고 가까운 나의 미래를 그리고 싶은 곳이다. 그래서 나는 외쳤다.헬조선이 아닌 'Hej (안녕)조선'이라고. 사실 돌아온 후에도 나는 스웨덴을 마음 속에 그리며 마음 속 장마는 그칠 줄 몰랐다. 정당하게 주어지는 6개월 구직 비자를 포기하고 돌아오기로 한 결정이 과연 잘한 것일까 하루에도 수십 번 되묻곤 했다. 하지만 이 글을 쓰는 한국에 온 지 2주가 다 되어가는 지금, 이제는 내 마음의 장마 전선이 물러나고 있음을 느낀다. 중요한 것은 내가 스웨덴에서 배운 소중한 가치들과 내가 옳다고 믿는 신념들을 결코 저버리지 않는 것이다. 내 마음 속의 장마전선이 물러나는 지금 우리 나라에 장마 전선이 전국을 뒤덮고 있는 것은 우연일까.
지난 이년간 나의 유학기를 읽어주신 구독자 분들께 정말 감사드린다. 스웨덴에서 유학생활을 하며 감사히도 브런치를 통해 가슴 한 켠에 스웨덴이라는 나라에 대한 동경과 관심을 가진 한국의 여러 독자분들과 소통할 수 있었다. 나 역시도 스웨덴에 대해 잘 모르고, 조금씩 알아가며 배운 것들을 나누고 싶었기에 시작한 글쓰기는 어느새 내가 알던 정보를 나눔으로써 누군가에게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기 위해 미약한 도움이 되기도 했고, 꿈을 좇아갈 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하기도 했으며, 내 스스로의 다양한 감정을 분출하던 분화구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스웨덴에서 글을 쓰면서 한국의 독자들과 소통하던 경험은 디지털 노마드로서의 삶을 조금이나마 경험할 수 있게 주었으며, 다양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과 연결되는 짜릿함을 선물해주었다. 나의 소중한 흔적들이 미래에 스웨덴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며, 나는 또 다른 콘텐츠로 맛깔스런 브런치를 채우고자 한다. 앞으로도 나와 당신 우리의 이야기를 통해 서로의 연결점을 찾을 수 있길 바란다.
그동안 유학기를 구독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못다한 스웨덴 이야기를 추후 몇 개 업로드 하겠지만 당분간은 스웨덴 이야기는 전달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그래도 다른 가치있는 이야기들로 소통할 수 있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