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남편의 거짓말과 미역국

불안 대신 마음의 평온을 채운 서프라이즈 아침

by 국경 없는 펜

부스럭부스럭 대는 소리와 밤새 뱃속에서 열심히 헤엄치면서 노는 아기 덕분에 오늘도 역시 일어나야 할 시간보다 1시간 더 잤다. 하지만, 이제 이렇게 불규칙한 생활이 더 이상 스트레스만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통제되지 않는 상황에 대한 통제하고자 하는 욕망을 내려두고, 우선순위에 나와 아기의 안위를 두다 보니 무엇이 내게 더 중요한지가 분명해졌다. 1시간 더 잔 것에 대한 죄책감 따위는 없다. 임신을 받아들이고 나서부터다.


새벽에 잠을 설치다 짧지만 달콤한 깊은 수면을 1시간 더 자고 맞이하는 아침. 침실의 블라인드를 걷고 창문을 열고 상쾌한 공기를 크게 한숨 들이마셨다. 차가운 공기가 코와 따뜻하게 데워졌던 내 몸에 닿을 때의 그 순간이 나는 참 좋다. 새로운 하루를 축복하는 것만 같은 밝은 햇살과 상쾌한 공기에 비몽사몽 했던 정신이 깨고, 오늘 하루는 어떤 순간으로 채워질까에 대한 기대감으로 지난밤 내내 깨끗하게 비워진 몸과 마음을 채운다. 뱃속 아가에게 굿모닝 인사를 하고, 기지개를 쫙 켜고 거실로 나오자 인사와 포옹으로 따뜻하게 맞이해 주는 남편.


“굿모닝 and I wish you a very happy birthday (좋은 아침이야, 그리고 생일 너무 축하해!)”

“고마워어어어어어”


매년 찾아오는 생일이 뭐 별 것인가 싶다가도, 가장 소중한 사람들의 따뜻한 인사만으로도 그날 하루는 1년 중 가장 행복한 하루가 되는 것 같다. 한동안 따뜻한 남편의 품 안에서 머물다 테이블 위에 놓인 무언가에 눈길이 닿았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선물과 엽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동네 빵집의 아몬드 크로와상까지. 이 크로와상이 먹고 싶어 얼마전 베이커리에 다녀왔지만, 다 팔려서 사지 못했었는데...

아침 일찍 부스럭부스럭 대던 소리의 정체를 파악하자 풉 웃음이 나오고, 미소가 번진다. 이걸로 충분하다. 오늘 하루는 이미 감사와 기쁨으로 충만해졌다. 부산스럽게 아침부터 무얼 준비하지 싶다가도 부스럭대는 소리에 잠을 설쳐 약간 예민해졌었는데, 아침 일찍부터 생일 서프라이즈를 준비해 준 남편의 예쁜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


아침 일찍 지도교수와 미팅이 있다고 착한 거짓말을 한 남편은, 문 열자마자 오전에 솔드아웃 되는 아몬드크로와상을 사기 위해 7시 되자마자 빵집에 다녀왔단다. 이 빵집은 7시에 문을 연다. 그러더니 또 부스럭부스럭 대며 주방 천장과 냉장고에 숨겨놨던 슈퍼마켓 쇼핑백을 꺼낸다.


“도희, 이건 절대 열어보지 마!”

어젯밤 나에게 대놓고 보여주며, 손대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던 그 쇼핑백.


‘이건 또 뭘까?’ 내심 차오르던 기대감에 쇼핑백에서 무엇이 나오는지 지켜보는데, 예상치 못한 물건들이 나와 웃음이 빵 터졌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남해안산 청정 미역, 국간장, 언제나 맛있는 햇반, 그리고 마늘까지.

생일 서프라이즈

“도희 오늘 미역국 끓여주려고. 내가 임신하면 끓여주기로 약속했는데, 오늘 끓여주면서 배우고 출산하고 나서도 끓여 갈게”


아....! 호주 슈퍼마켓 봉투에서 미역국 재료가 나오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이거 사러 어디까지 갔다 온 거야?”


“한국 마트에 가서 다 사 왔어. 어제 수업 끝나고 미팅 있다고 한 것도 거짓말이야 ㅎㅎ”


나는 미역국을 정말 좋아한다. 생일이 아니어도 종종 끓여 먹는다. 사실 건미역도, 국간장도, 마늘 (심지어 다진 마늘로) 도 다 집에 있는 재료지만 남편에겐 말하지 않았다. 평생 한 번도 끓여보지 않은 미역국 레시피를 찾아보고 재료 사러 다닌다고 고생했을 텐데. 국간장 건미역이 더 생기면 어떤가! 두고두고 그의 마음을 생각하며 먹을 테다.


평생 단 한 번도 요리해 본 적 없는 미역국. 우리 집 영국 남자는 유튜브 레시피를 보며 서툰 칼질과 가위질로 낯선 재료를 다듬는다. 서툴지만 차근차근 생애 첫 미역국을 끓이기 시작한다. 물가에 아이를 내놓은 마냥, 칼질하다가 다치는 건 아닌지 미역국을 제대로 끓이고 있는 건지 어깨너머로 바라보다 오늘은 주방을 남편에게 오롯이 맡기기로 했다. 그곳이 남편의 무대가 되도록.


“아, 고기를 올리브 오일에 볶았으면 안 되는데”


국거리용 소고기 찾기 어려운 호주. 호주 슈퍼마켓에서 두툼한 우둔살 스테이크 부위를 사 온 남편이 프라이팬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고기를 익히는 걸 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올리브유에 구우면 어떤가! 오늘 그만의 레시피인 것을.


“괜찮아, 아무렴 어때. 이렇게도 먹어보는 거지~ 맛있겠다!”


맛있겠다는 내 말에, 남편은 이거 먹고 더 이상은 내가 끓인 미역국을 먹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너스레를 떤다. 잘 익은 우둔살을 큰 냄비에 넣고, 참기름과 미역을 둘러 살짝 볶은 후 물을 채운다. 이제 복잡한 과정은 끝났다.


“최소 20분 정도 이제 익히면 돼.. 아침으로 준비하려 했는데, 이른 점심으로 먹어야겠다!”


늦어지면 어떤가, 미역국을 끓이는 그 마음이 참 고맙고 예쁜 것을.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미역국에 담긴 그의 마음을 생각해 본다. 며칠 전부터 혼자 얼마나 고민했을까. 어떤 서프라이즈를 해줄지, 어떻게 끓여야 할지, 내가 할 수 있을지 등등.


올리브유가 살짝 들어간 미역국! 맛이 어떻든 간에 미역국 한 솥에 담긴 그의 마음만으로 이미 그 미역국은 내 인생의 최고로 맛있고 따뜻한 한 그릇의 선물이 될 것이다.


"도희, 맛볼래?"

그가 긴장된 표정으로 시식의 기회를 건넨다. 냄새는 완전 미역국인데 올리브유에 살짝 볶은 우둔살은 어떤 식감일지 가늠이 안 갔다. 마스터셰프의 심사 위원이 된 마냥 국물을 한 숟갈 떠서 호로록 마셨다.


'어? 거짓말 안 하고 간이 딱 맞다. 너무 맛있다.'


"국간장이랑 소금 넣었어?"라고 물었더니 남편은 국간장에 집에 있는 피쉬 소스(까나리액젓 비슷한 태국식 액젓)로만 간했단다. 요리에 소질 없다던 이 남자는 간 귀신임이 틀림없다.


궁금하던 올리브유에 구운 우둔살 한 점을 들었다. 두툼하던 고기 한 점이 정말 씹을 것도 없이 사라졌다. 오래도록 중 약불에서 뚜껑 닫아 구운 덕분인가? 고기가 정말 연해 깜짝 놀랐다. 강불에 미역도 고기도 빠르게 볶는 성질 급한 나와 달리, 천천히 느긋하게 재료를 손질해서인지 고기도 푹 끓인 미역도 술술 넘어간다. 앞으로 미역국은 남편에게 맡겨야겠다.


머나먼 호주에서 맞는 첫 생일이자, 우리 가가 태어나기 전 둘이서 맞는 마지막 생일. 미역국 전문가로 거듭난 남편 덕에 따뜻한 한상으로 배를 채우고, 그의 정성과 사랑으로 하루를 채워간다.


별 것 같지 않던 생일은 별 것임에 틀림없다. 세상에 건강하게 태어나 자라 이런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유튜브에 국경 너머 바라본 삶의 깨달음과, 호주에서의 소소한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위로와 공감을 함께 나눌 수 있으면 더할 나위없이 감사하겠습니다. 댓글, 구독과 좋아요는 창작에 큰 힘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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