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과 정직, 그리고 거짓
드라마 <런온> 1~3회를 보고
얼마 전에 가수이자 작가인 요조의 인터뷰 기사를 봤습니다. 지우고 싶은 흑역사, 감추고 싶은 지난날에 대한 질문의 답변을 보고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습니다.
그 순간에 대해서 솔직하게 언급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감추고 싶은 것은 감추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솔직 만능주의자가 아닙니다. 가식과 은폐도 솔직만큼이나 미덕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저의 감추고 싶은 지난날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저 답변 자체가 이미 굉장히 솔직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솔직하게 언급하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다고 하니 제가 생각하는 '솔직'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됐어요. 먼저 사전을 찾아봤습니다.
솔직 : 거짓으로 꾸미거나 숨김없이 바르고 곧음
어려운 단어가 하나도 없는데도 이 한 문장만으로는 명쾌하게 의문이 해소가 되지 않아 사람들이 '솔직'을 어떤 상황에서 사용하는지 검색해봤습니다. 대체로 자기감정에 충실한 것, 사전적 의미의 '숨김없이'에 방점이 찍혀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드라마 <런온>을 보다 보니 드라마의 인물들에게서도 '숨김없이'에 집중된 솔직함이 엿보입니다.
기선겸이 오미주에게 "차는 안 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운전을 약간 거지같이 하던데."라고 하거나 김우식이 기선겸에게 "재수 없네요."라고 하는 것들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듣는 사람이 별로 기분 나빠하거나 신경 쓰지 않아요. 그래서 그들이 쿨해 보이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면 책, <너는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의 '누가, 그리고 어떤 일이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가는 상처 받는 사람에 의해 결정된다.'라는 문장이 생각납니다. 등장인물들이 유독 자존감이 높은 걸까요? 아니면 요즘 사람들의 대화 패턴이 그런 걸까요?
그런데 이런 솔직함이 꼭 좋기만 한 건 아니겠지요.
기선겸이 술에 취해서 오미주에게 뽀뽀를 한 다음날 나한테 왜 그랬냐고 묻는 오미주에게 말합니다.
"상황을 모면하고 싶었어요. 하필 옆에 있던 게 오미주씨였고요."
"어제는 제가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옆에 있던 게 누구든 봉변당했을 것 같은데..."
기선겸은 숨김없이 이야기했지만 오미주는 기분이 나빠졌습니다. 오미주에게 솔직했지만 그녀를 배려하지 못한 거죠. 어찌 보면 무례할 수도 있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런온>의 등장인물들이 무례하기보다 솔직하게 느껴지는 건 아마도 '나'중심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상대방을 아예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내 감정이 먼저라고 느껴져요. 이게 바로 솔직함의 포인트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짓으로 꾸미거나 숨김없이'는 나에게 해당한다는 거죠. 내가 내 감정을 들여다보고 나 자신과 대화할 때는 솔직하게 하면 된다지만 다른 사람에게 표현할 때는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베른하트르 부엡은 그의 책 '왜 다시 정직인가'에서 정직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정직한 사람은 나와 남을 존중한다. 진실을 말하되 배려할 줄 안다. 또한 자신을 점검하며 불의에 맞서 용기 있게 행동한다.
정직의 사전적 의미는 '마음에 거짓이나 꾸밈이 없이 바르고 곧음'입니다. 솔직의 의미와 매우 비슷하지요.
베른하트르 부엡의 글을 읽으며 제가 그동안 생각했던 솔직함이란 정직에 더 가깝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저는 솔직함을 한마디로 '직면하고 책임지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숨김없이 있는 그대로 표현하면 끝!'이 아니라 상대방의 반응을 비롯, 이후의 여러 결과에 책임지겠다는 마음으로 용기 있게 드러내는 것이라고요. 이제는 거기에 더하여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담아야겠습니다.
드라마 <런온> 이야기를 조금 더 하자면 기선겸은 정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소통하는 방법이 서툴러서 '하필 옆에 있던 게 오미주씨였고요.' 같은 말을 무심하게 내뱉기도 하지만요. 기선겸이 정직한 사람이 된 데에는 아마 아버지, 기정도 의원의 영향이 컸을 것 같아요. 기정도 의원은 집안에서는 권위주의적이고 가족들을 자기 소유물처럼 생각하며 정치 인생의 도구로 활용합니다. 때로는 폭력을 쓰기도 하는 아버지가 외부에서는 다정하고 애정이 넘치는 남편이자 아버지를 연기하는 것에 넌더리가 났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기선겸의 정직하고 원칙을 지키려는 태도는 여러 가지 불편과 불이익이 따라옵니다. 육상 국가대표를 은퇴하면 감독이 되겠다는 목표도 이룰 수 없게 되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모두 감수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지켜나가는 기선겸의 모습이 저는 참 좋습니다.
제가 아이를 낳고 꼭 지켜야지 다짐했던 것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이 거짓의 의미도 사람마다 각색되고 희석된다는 걸 느꼈습니다. 누구를 위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대의와 명분 앞에서 힘을 잃는 정직을 느끼며 암담하기도 하고 기운이 빠졌는데 기선겸을 보면서 힘을 얻었습니다. 물론 기선겸이 경제적으로 자유롭다는 점이 참으로 드라마스럽기는 합니다. 그것이 그를 더 자신의 소신대로 살게 하는 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요조의 인터뷰와 드라마 <런온> 덕분에 솔직과 정직, 거짓에 대해서 재정립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내가 추구하는 어떤 가치를 삶으로 살아내려면 명확한 이해와 정의가 필요하다는 걸 느낍니다. 자칫 잘못 정의를 내리게 된다면 거짓이 거짓인지 모르고, 솔직함과 무례함을 혼동하게 될 수도 있을 테니까요.
표지사진 출처 : JTBC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