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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까지 잘 구워졌을까?

여백이라는, 내적 성숙의 신호

by Yujin


구수하고 달달한 향이 공기 속에 차츰 번지기 시작한다. 아, 이제 거의 다 구워졌구나.


새로운 빵을 연구하고 테스트할 때라면 모르겠지만, 자주 굽는 빵은 타이머보다 냄새와 구움색을 보고 완성을 가늠하는 때가 많다. 그날의 온도와 습도, 약간의 재료변화에도 빵의 상태는 그때그때 달라지니까. 같은 시간을 구워도 어느 날은 더 크거나 작게, 또는 색이 진하거나 연하게 나올 수 있다.


오븐에서 꺼낸 후에는 노크하듯 빵을 두드려 '텅텅' 하는 가벼운 소리가 나는지 확인한다. 덜 익으면 맑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 과하지 않지만 충분한 숙성의 시간을 거쳐, 탄생에 필요한 만큼의 뜨거운 열과 압력이 주어진 반죽만이 빵으로 바뀐다. 머핀이나 파운드 같은 제과류는 금속 테스터로 찔러 반죽이 묻어 나오지 않는지 확인한다.


때로는 약간 덜 익은 빵에서 의외의 맛이 날 때도 있다. 누군가의 어설픈 위로에도 따뜻함은 그대로 전해지듯이, 촉촉한 느낌이 남은 질감도 매력이 될 수 있다. 미성숙한 마음으로 살아간다고 해서 덜 가치 있는 삶은아니듯이. 하지만 세상의 진리가 모두 다르지 않고 결국 하나의 길로 향한다면, 사람의 성숙함을 빵 두드리듯 확인해 볼 수 있는 방법도 있을까 궁금해진다.






배려심 있는 말, 잔잔한 미소, 겸손, 예의 바른 태도, 보려 하지 않아도 보이는 마음씀씀이. 한 사람의 건강하고 아름다운 내면은 다양한 방식으로 암시된다. 그렇다면 성숙한 삶은 어떤 모양일까?

문득, 오래전 스쳐간 [맑고 향기롭게]라는 법정 스님의 책이 떠올라 물건들로 막혀있던 책장 한편을 뒤졌다. 15년 전에 나온 산문집답게 표지색이 빈티지하게 바랬지만 속은 깨끗하다. 연필로 그은 줄도 없는 점으로 볼 때 당시 조금 읽고 만 것 같다. 이제는 읽고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의 삶이 쌓였다고 책이 다시 날 소환한 걸까.


직접 돌을 나르고 나무를 다듬어 지은 산방에서 전기조차 없이 자연 속에 은둔하며 글을 쓰신 스님. 사람의 향기에 대해 언급하신 부분을 찾아봤다.



"한 사람의 맑고 조촐한 삶은 그 자신이 의식을 하건 말건 함께 살아가는 이웃에 달빛 같은 혹은 풀 향기 같은 은은한 그늘을 드리우게 마련이다. 그의 삶을 가까이서 지켜본 나는 그를 생각할 때마다, 꽃가지를 스쳐 오는 부드럽고 향기로운 바람결을 느낀다."


"삶의 향기란, 맑고 조촐하게 사는 그 인품에서 저절로 풍겨 나오는 기운이라고 생각된다. 향기 없는 꽃이 아름다운 꽃일 수 없듯이 향기 없는 삶 또한 온전한 삶일 수 없다."

- 법정, <맑고 향기롭게> 중에서



조촐함은 비어있음이다. 누군가에게 관심을 갖고 사랑을 줄 수 있는 힘은, 자기 자신으로 꽉 차 있지 않은 마음의 여백에서 나온다. 생각이 낳은 집착과 걱정으로 질척이지 않는 빈 공간에는 외부의 자극에 동요할 만한 것이 없다. 두드렸을 때는 가볍고 맑은 울림이 되돌아오고 깊숙이 찔러봐도 묻어나지 않는다.


매일 처음으로 맞닥뜨리는 나날과 환경은 천연효모가 되어 삶을 발효시킨다. 고통스러운 불 속에서 형질이 바뀌는 점도 빵과 다르지 않다. 활활 타오르는 담금질을 견뎌 스스로를 완전히 변화시킨 사람에게서 아무런 향기가 나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이 아닐까. 의식적인 노력이라면 더욱 진한 기운이 풍길 수밖에 없으리라.


나는 '영향력'보다 '영향'이라는 단어를 더 좋아한다. 한 음절 차이이지만, 두 단어는 거의 반의어가 아닌가 싶을 만큼의 뚜렷한 간극이 있다. 그 말을 사용하는 이의 삶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는. 그림자 영, 울릴 향. 영향影響은 그림자처럼 자연스럽게 미치고, 울림처럼 스며드는 힘이다. 억지로 쓰는 글과 저절로 써지는 글이 다른 것처럼, 외부에 의도를 행사하려고 들지 않음으로써 비로소 얻는 에너지는 훨씬 부드럽고 탄력적이다.


물 흐르는 듯 우아한 태극권의 움직임처럼 힘과 욕망을 내려놓고 비우는 데서 드러나는 본연. 무르익은 참나의 아우라를 풍기는 존재들에게 이끌리며 물들고 싶다. 공기가 자유롭게 드나들며 숨 쉬는 빵처럼, 내적 성숙은 숭숭 뚫린 여백을 낳고 그 여백은 향기를 자아낸다. 오늘도 수많은 재료들을 통해 구워지면서, 나는 얼마나 비워진 향기를 우주에 흘려보내고 있을까. 그 향기는 어디에 닿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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