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오픈한 매장은 직장인 상권 안에 있었다.
피크 시간대인 점심 무렵마다 숨 가쁨에 시달리던 날들. 누군가는 바쁘면 매출이 느니 행복하지 않냐 하겠지만, 긴장이 지속되는 몸과 마음은 그렇지 않다.
점심시간의 짧은 여유는 누구에게나 소중한 법. 손님들은 잠시 앉았다 빨리 일어나기 위해 일회용 컵을 요구했고, 머그에 한두 모금 남긴 채 옮겨달라는 요청은 더 많았다.
정신없는 와중에 같은 일을 두 번씩 하니 손이 떨리며 신경이 곤두서고, 물쓰듯 하는 일회용품에 죄책감이 들었다. 사소한 일로 남편과 크게 다투는 건 덤!
그 밖에도 통화를 하며 들어와 코끝으로 디저트를 가리켜 주문하는 사람, 저녁에 맥주나 와인을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 취객, 모든 디저트를 주문해 한 입씩만 맛보는 분- 처음 겪는 상황은 다양했다. 굳은 몸으로 나는 병원을 자주 드나들었다.
퇴근하면 남편이 자란 작은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씻고, 바로 취침. 거실에는 시어머님과 당신이 입양봉사하시는 아기들이 있었는데 아기들은 새벽에도 곧잘 울었다.
피곤한 몸으로 다시 일어나 출근하는 길에 듣던 김창완 아저씨의 라디오. 그게 가장 큰 하루의 낙이었다.
오픈한 지 2년째에 팬데믹이 발발했다.
매출이 0으로 수렴하자 도저히 월세를 낼 수 없어 마음이 쪼그라들고, 뒤켠 창고에서는 쥐까지 출몰하기 시작했다.
손님이 없어 나른하게 쳐져있던 어느 날 오후.
남편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시어머님의 연락이었다. '집이 팔릴 것 같다'는.
몇 년째 부동산에 내놓아도 소식이 없던 한 동짜리 아파트를 드디어 사겠다는 이가 생겼다고.
이야기를 들은 순간 갑갑했던 주변 공기가 확 걷히는 듯 느껴졌다. 이 상황을 벗어날 기회가 온 걸까?
천천히 숨 쉬고, 사람의 얼굴을 마주 보면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날들이 올지 모른다는 희망이 생겼다.
‘어쩌면 꽉 막힌 도심이 아닌 탁 트인 자연 한가운데에서, 손님과 우리를 모두 보살필 수 있을지도..!‘
꿈꾸듯 매장 안을 서성인 변화의 날이었다.
고심 끝에 우리는 평택으로 이사했고
집은 논밭에 둘러싸인 시골 쪽, 매장은 아파트가 많은 구도심 공원 앞으로 구했다.
도농복합 시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시골의 면모가 많은 무연고지. 이곳 사람들이 익숙하지 않은 '비건'빵을 만들어 팔겠다는 결심은 예상보다 더 무모하고 파격적이었던 모양이다.
코로나가 절정일 때 왔으니 조금 견디면 손님이 (서울에서만큼은 아니어도) 몰려들 줄 알았지만 웬걸, 가게는 너무 평온했다. 처음에 일회용 컵 미사용과 텀블러 대여까지 내세우니 화를 내는 손님을 만나기도 했고, 서울에서와 달리 주 5일을 근무하면서 "여긴 왜 맨날 쉬어요?"라고 따지는 분들도 만났다.
삶의 문법을 송두리째 바꾸는 일은 즐겁고도 힘들다. 육식을 즐겨하는 이곳 사람들의 식습관에 작은 영향이라도 미치기가 쉽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후 평택에 생긴 많은 비건빵집들은 금방 생겼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서울에서보다 매출이 줄고, 힘든 상황이 매년 신기록처럼 경신되었지만 그때마다 이겨낼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어디에 있었을까.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 손님들과 함께 건강히 즐기고, 눈앞의 짧은 시간에 곤두서지 않아도 되는 느린 환경.
손님과 눈 맞추고 스몰토크도 할 수 있는 베이커리를 꾸리며, 집에서 심신을 충전할 수 있는 매일이 사실은 만족스럽기 때문이었다.
평택의 자연 속에 적응해 가며, 나는 명상에 점점 빠져들었다. 매일 눈을 감고 아침저녁으로 명상을 거듭할수록, 시공을 초월한 존재로서의 우리를 직시하고 탐색할 수 있는 삶은 돈으로 살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제는 평택이 아니더라도, 내면의 소리를 따라 살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가을이 되니 어깨는 더 편안히 내려오고,
호흡은 점점 더 깊어져간다.
오픈한 지 4년이 지난 시점에서 돌이켜보니, 어떻게 비건빵집을 차리게 되었느냐고 묻는 말에 이제는 이렇게 답할 수 있지 않을까.
“사는 것처럼 살고 싶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