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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엘 Sep 01. 2023

아내를 우러러 딱 한 점만 부끄럽기를

사랑이란

사람이건 동물이건, 형이상학적이든 육체적이든 욕망을 채울 수 없으면 고통스럽다. 


그럼, 욕망이 충족되면 고통은 사라질까?


동물은 그렇지만 인간은 다르다. 욕망이 사라진 자리에 허무와 지겨움이 스멀스멀 들어찬다. 


권태다. 권태 역시 고통이다.  


권태를 쫓기 위해, 죽을 것 같은 지겨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간은 새로운 자극과 욕망을 찾아나선다. 


그렇게 욕망과 권태 사이를 그네처럼 왔다갔다 하면서 스스로를 고통의 톱니바퀴 속에서 소진시킨다.  


사랑을 끌어가는 동기 상단부에 욕망이 자리하게 되면 그 사랑이 깨지는 이유도 말라붙은 욕망을 비집고 들어찬 권태 때문이다.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은 호르몬 때문이라고, 뇌의 작용 때문이라고, 인간은 애당초 그렇게 생겨먹은 존재라고 정당화한다. 


또 다른 이들은 상담과 약물과 마음챙김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한다.      


정말 그럴까?


다른 사람들 사랑 이야기를 단계별로, 종류별로, 입맛대로 골라볼 수 있는 세상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곳에서는 온갖 종류 욕망이 낭만으로 포장되고, 교환가치는 판타지로 둔갑하고, 권태는 이별을 위한 합리적 이유로 정당화된다. 


모든 것이 가득한 그곳에, 희생과 헌신은 없다. 


신적 사랑과 인간의 사랑을 날카롭게 구분하고, 모성애와 우정과 연인 간의 사랑을 다른 범주로 쪼개면서, 우리는 사랑을 타락시켜왔다. 


윤리, 의무, 희생, 헌신은 빠지고 오감과 욕망이 주인 행세하는 감각적이고 감성적이며 신경학적 상태를 연인 간의 사랑이라 서로를 세뇌해왔다.     


모든 이를 사랑하기 위해 청년 예수는 제 생명을 십자가에 매달았고 청년 싯다르타는 사회적 죽음으로 걸어 들어갔다. 


두 청년이 우주적 상상력으로 제 몸 태워 써내려간 사랑 시는 세상과 만물과 단어들이 새로운 의미로 불타오르게 했고, 의미 분절이 불가능한 절대적 사랑을 우리 정신에 고양시켰다. 


덕분에 우리는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청년 예수와 청년 싯다르타가 모든 이를 사랑하기 위해 바친 고결한 희생과 헌신을 내 연인에게 오롯이 바치는 것, 그게 사랑이다. 


부모를 사랑하고, 자녀를 사랑하고, 친구를 사랑하고, 반려동물을 사랑하는, 그 모든 사랑을 합친 분량과 두께로 내 연인을 사랑할 때 비로소 사랑을 살게 된다. 


사랑이 상식과 판단, 논리를 뛰어넘을 때 그 사랑은 초월의 지렛대가 되어, 쾌락을 넘어, 궁극의 행복으로 우리를 휘몰아 간다.     


사랑에는 수고가 따르고, 그 수고는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노력이다. 


노력하는 한, 인간은 행복하다.      


('아내를 우러러 딱 한 점만 부끄럽기를'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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