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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엘 Mar 15. 2024

당신의 눈길이 물로 가면, 물이 인

언어와 사고

5~6년 전 곽지해수욕장 바로 옆에서 살았었다. 매주 두 번, 인문학 강의를 위해 시내로 나왔다.


오전 수업과 저녁 수업 사이 비는 시간엔, 한라대 앞 에이어바웃 카페에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놀았다.


몇 시간 앉아 있으면, 참 재밌다.


일단 엄마들. 예외 없이 아이들 공부 이야기 학원 이야긴데, 미안하지만 하나같이 10년도 훨씬 전 패러다임이다. 아니면 뇌피셜.


내가 한때 서울에서, 라며 오지랖 좀 날리고 싶은 충동에 혀가 간질간질하다.


제일 흥미로운 건 대학생들. 옆에서 재잘재잘, 참 부러운 젊음인데, 거의 모든 단어에 ‘개’가 붙는다.


명사 앞에도 붙이고, 형용사 앞에도 붙이고, 붙일 수 있는 데는 다 붙인다. 그러니 카페 안이 온통 ‘개’판이다.


슬쩍 슬쩍 얼굴들을 보면 참 다들, 순둥하게 생겼다.


수업할 때 초중학생들도 마찬가지다. 내 앞이라 자제하는 모습이 역력하지만, 한 번씩 지들끼리 흥분하면 여지없이 ‘개’들이 몰려나온다.


생각해보니 20년 전엔 아이들이 ‘존나’를 입에 달고 살았었다.


여기서 문제. 저런 어휘들이 아이들 심성을 변화시킬까?


그렇다는 쪽을 ‘언어 상대론’ 혹은 ‘언어 결정론’이라 한다.


언어마다 세상을 범주화하는 방식이 다르기에, 다른 언어 다른 어휘를 사용하면 다른 인지 구조를 가지게 된다는 이론이다. 사용하는 언어나 어휘가 사고 방식에 영향을 준다는 주장이다.


에드워드 사피어와 워프가 선구자다. 유식하게 ‘사피어-워프’ 가설이라 부른다. 고등학교 국어 모의고사에 수시로 등장한다.


“뭐라고? 큰일이네.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 아이들 입에서 ‘존나’와 ‘개’를 떼버려야겠다.”


괜찮다.


언어 결정론은 상식에 맞고 매력적이긴 하지만 ‘과학적 증거’가 없다. 언어학계와 철학계에선 마술적 사고로 치부된다.


“어, 아닌데. 어떤 책이나 영상을 보니까, 에스키모는 눈[雪]을 표현하는 400개 단어가 있어서, 그게 에스키모들 사고에도 영향을 준다고 하던데.”


오버다.


1911년 인류학자 프란츠 보아츠가, ‘에스키모는 눈을 표현하는 4개 단어를 갖고 있다’고 언급한 후, 이게 사람들 입을 거치면서 400개까지 부풀었다.


여러분이 본 건 아마 4개와 400개 사이 어디쯤일터.


언어 결정론을 가장 격렬하게 공격하는 이는 그 유명한, 하버드 맨 ‘스티븐 핑커’다.


그럼, 아이들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


그것도 아니다.


언어 결정론이 옳다는 증거들이 요사이, 미세하지만, 인류학계에서 조금씩 등장하고 있으니까.


게다가 언어를 사용하는 본인 사고엔 영향을 안 미칠 진 모르겠지만, 듣는 사람에겐 다양한 빡침을 제공하니까.


아이들 어휘가 갈수록 단순해지고 있다. 내 감정을 미묘하게 표현할 수 있는 수많은 언어들이 ‘짜증난다’ 하나로 수렴하고 있다. 세밀한 감정 표현이 내밀한 소통 도구일 수 있는데도 ‘귀찮다’는 표현 하나로 마감해버린다.


‘지구에서 꽃 한 송이를 꺾으면, 가장 먼 우주의 별이 움직인다.’


중력을 이보다 더 우아하게 표현한 걸 본 적 없다. 양자역학의 아버지, 폴 디랙이 말했다.


‘우리가 무엇이든 그것 하나만 집어올리려고 해보면, 그것이 우주의 나머지 모든 것들과 얽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100년 전 미국 환경주의자 존 뮤어가 한 말이다. 의도했는지 모르겠지만, 힌두교와 불교의 인드라망을 기막히게 설명했다.


‘당신의 눈길이 물로 가면, 물결이 인다. 당신의 손길이 흙으로 가면, 씨앗들이 부풀어 오른다.’

칠레 시인 네루다가 썼다.


이런 아름다운 말과 글을 잃어가는 우리가 안타깝다.



['그곳은 소, 와인, 바다가 모두 빨갛다' (21세기북스) 언어 결정론을 주장하는 책이다. 지적 호기심이 충만한 분들에게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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