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고전

도끼다운 책

by 조이엘

서울대에 합격했으니 이제 내 인생은 탄탄대로(坦坦大路), 무한행복이 시작되리라 믿었다.


스카이 합격이 출세를 보장했던 90년대 이야기다. 보장된 인생이니 노력할 이유도 없다. 공부가 사라진 대학생에게 삶은 매일이 천국이었다.


그렇게 무위도식(無爲徒食)을 이어가던 어느 날, 선배가 던져 준 얄팍한 영어책이 내 천국을 깨뜨린다.


Is there any knowledge in the world which is so certain that no reasonable man could doubt it?


너무 확실해서,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절대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지식이 과연 세상에 존재하는가?


버트런드 러셀, The Problems of Philosophy


15장으로 구성된 얇은 책이다. 1장도 채 끝나기 전에 내가 발 딛고 서 있던 우주(宇宙)는 완전히 무너졌고 ‘확실한 지식’이 유발하는 갈증이 삶의 유일한 동기가 되었다.


서양철학과 종교학을 주 전공으로 역사학, 문학, 미학, 언어학, 심리학, 뇌-인지과학, 인류학, 사회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우주론, 과학철학까지.


그렇게 시작된 연구와 독서가 30년을 바라보고 있으니 어쩌면 내 삶은, 20대 때 부딪친 짧은 질문 하나에 답하기 위한 삶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현재까지 찾은 확실한 지식은 세 가지다.


1 노안은 생각보다 훨씬 빨리 온다.

2 인명재처(人命在妻), 사람의 운명은 아내에게 달려 있다.

3 고전(古典)보다 유익한 책이 꽤 많다.


나이가 들수록 어려운 책이 부담스럽다. 똘똘한 중3 제자의 질문 때문에 십수 년 만에 플라톤 책들을 다시 들춰본 이후 그와는 영원히 안녕을 고했다.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은 그간 쌓은 정(情)이 너무 두터워 차마 결별하지 못하고, 영정 사진처럼 서재에 모셔 두고 있다. 같은 이유로 수천 권의 고전들 역시 서재 풍경화로 남을 확률이 거의 100퍼센트다.


다음은 내가 좋아하는 고전 정의다.


당연하게 믿어온 지식과 진리 체계를 지속적으로 공격하고, 인식 기반을 흔들어, 새롭게 방향을 잡도록 도와주는 책


2000년 이후 괴물 같은 지식인들에 의해 이런 책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나는 이런 책들을 ‘새로운 고전’이라 부른다. 사실 추천한 사람도 읽어보지 않았을 동서양 고전에 목매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도래(到來)했다고 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말년에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지(知)의 거장 ‘다치바나 다카시’는 이렇게 말했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은 그리 좋은 책은 아니다.


2000년대 초반부터 강의나 블로그를 통해 ‘새로운 고전’을 소개하고 있다. '1센티 인문학'은 그보다 더 쉽게 여러분을 지식 세계로 초대한다. 어쩌면 지식 세계를 안내하는 카탈로그 정도로 생각해도 좋겠다.


책이 가벼우니 살짝 무거운 아인슈타인 말로 끝내겠다.


세상에는 무한해 보이는 것이 두 개 있다.

‘우주’와 ‘인간의 어리석음’

둘 중 덜 확실한 것은?

우주.


1센티인문학_입체표지.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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