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직(移職)의 노하우

떠올리고 싶지 않은 황당 면접의 추억

by energypaper

난 본의 아니게 이직(移職)이 잦았다.


오래전 IMF로 인해 '평생직장'이란 개념이 사라진 세상이 도래하면서 더 이상 이직이라는 것이 낯설고 두려운 일이 아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이직을 통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이들이 있다.

마치 초등학교 때 학년이 바뀌어 새로운 교실, 새로운 담임 선생님, 새로운 친구들과 사귀는 것이 낯설고 두려워 등교가 꺼려지던 것처럼 이직은 매우 많은 에너지 소비와 스트레스를 동반하게 된다.


나도 그랬다. 다시 새로운 세상을 열어나가야 한다는 것은 매우 두려운 일이었다.

아주 오래전 기억이라 정확한 내용은 가물가물하지만 '이직'의 고통이 '이혼'보다 더하다는 설문조사를 봤던 것도 같다.


IMF 직후 온 나라가 구조조정의 광풍에 휩쓸려 희망 아닌 희망퇴직과 권고사직에 등 떠밀려 나올 때 그 소용돌이 속에 살아남아 있는 것조차 버거워 나도 호기롭게 사표를 던지고 다시 새로운 세상의 문을 두드렸었다.


그 이후의 삶은 나에게 많은 변화가 있었다.

처음 겪어본 이직이 생각보다 매우 안정적(?)으로 진행된 탓에 다음번 다다음번의 이직은 큰 어려움 없이 진행되었다. 모든 게 처음이 어렵지 두 번 세 번은 노하우도 생기고 여유도 생기고 심지어 설레기도 했다.


사실 낯설고 두려운 건 이직이 아니라 그 과정인 면접이다.

짧은 한두 번의 인터뷰만으로 내가 그들에게 부합되는 인재라는 것을 표현하고 증명해야 하다 보니 매우 스트레스를 겪게 되는 행위이다. 게다가 이게 운 좋게도 한두 번에 끝나는 게 아니고 단기간 계속 겪어야 하는 행위라면.


그들 또한 짧은 시간 안에 인재를 판별하기 위한 갖은 아이디어가 쌓여 오만가지 방식의 면접을 제공한다. 지금처럼 다양한 채용플랫폼에서 일부를 대행해 주거나 검증해 주던 시절이 아니다 보니 더더욱 그랬다.


그러다 보니 별의별 면접을 다 봤다.

면접의 구성도 1대 1, 1대 多, 多대 多에 방식도 프레젠테이션, 즉석 테스트에 심지어 저녁에 식당에서 하는 술자리 최종면접까지.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황당한 면접은 모 공기업 자회사의 최종 면접이었다.

근엄하게 센터에 자리하신 분과 양옆에 배석하신 많은 분들 앞에 난 도살장에 끌려온 한 마리 양처럼 군대 차렷자세로 앉아있었다.


그때 인사담당자로 보이는 분이 액자형태의 무언가를 들어 올렸다.


다양한 색감에 부드러운 붓질로 나부끼듯 그려낸 무엇을 형상화한 것인지 도통 알 수 없는 추상화였다.

그때 센터의 근엄한 분이 그 그림을 가리키며 던진 처음이자 마지막 질문은 이것이었다.



"지금 저 그림을 보면서 떠오르는 것을 말씀해 보세요"



순간 눈앞이 깜깜해졌었다. '뭐냐.. 이건? 이게 질문이라고?'


듣도 보다 못한 공격에 잠시 이탈하는 정신줄을 부여잡고 논리적인 사고로 접근했다.


'이건 그림의 주제를 맞추는 것이 정답이 아니야. 최종 면접에서 보려는 것은 창의성이나 인성일 것이고 그걸 탄탄하게 풀어내는 논리를 보고자 하는 걸 거야. 그럼 50대 중반에 권위적인 모습을 보이는 저 사람이 원하는 답변은...'



그 순간 액자 속의 모호하던 추상화가 어머니의 자궁으로 보이기 시작했고 난 일주일에 전화 한 통 없는 무심한 자식에서 벗어나 어머니가 해주시던 도시락 반찬으로 시작해 외가댁인 삼척의 풍광을 너머 꽃을 좋아하시는(아니 좋아하셔야 하는) 소녀 같은 감성의.. 어머니로 빠져들고 들고.. 산은 결국 배로 향하고..



그렇게 면접은 끝이 났다.



결과는 당연히 떨어졌고, 난 그들에게 효자로 남았다.


세월을 먹고 연륜이 쌓이다 보면 사람을 보는 눈도 조금은 넓어진다고들 얘기는 하지만 여전히 사람을 알아보는 일은 어렵고 또 어렵다.


이제는 입장이 바뀌어 주로 면접자에게 질문을 던져야 하는 위치에 있다 보니 당시 그분의 질문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궁금해진다.


내게도 물어본다


'내가 최종 결정자다. 면접자에게 단 하나의 질문만을 할 수 있다면 어떤 질문을 던질 수 있을까"





*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근엄하신 그분은 모 정당의 낙하산 인사였다. 정치색을 드러냈어야 하는 게 정답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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