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저로 제주도보다 가성비가 좋다는 일본. 일출을 볼 수 있는 속초 양양의 동해. 수학여행 이후 가본 적이 없는 경주도 생각났지만, 여행을 떠나기 위해 숙소를 잡고 맛집을 검색하고 교통편을 예약하는 이 모든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 자체가 번거롭기도 하고 여행의 재미를 반감시키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점점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여행지에서 들렀던 관광지의 명소나 유적들보다 눈에 띄지 않은 평범한 장소, 사물, 일상에서 추억이 그 여행의 모든 것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길에 핀 들꽃에 눈이 가기 시작하면 늙어 가는 거라는 우스갯소리가 수긍되면서 여행은 곧 '쉼'이고 더치열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 떠나는 것도 여행을 즐기는 또 다른 맛임을 깨달아 가고 있다.
이번 남도여행에서 찾은 이곳도 그 궤적을 같이 한다.
추운 엄동설한의 여행에서 가장 생각나는 것은 뜨끈한 아랫목이다. 그것도 도심 찜질방의 온돌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뜨끈하다 못해 절절 끓는 구들장의 아랫목이다.
아무 생각 없이 내려온 목포에서 검색으로 찾은 시골 황토 민박.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곳에서의 2박 3일.
세상은 멈췄고, 난 토실토실 살이 올랐다.
흙집 민박 '아다마'
우리가 묵은 사랑채
숙소 앞 평상
정말 아무런 정보도 검색되지 않고 그 흔한 홈페이지도 없이 업데이트되지 않는 '네이버 카페'만 달랑있는 이 민박집.
네이버 지도로 주위를 검색해 보니 시골 국도변에 위치한 작은 동네라 변변한 음식점은 물론 그 흔한 카페도 하나 없다. 정말 주위에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숙소에는 TV는 물론 인터넷도 없다(전화는 터진다). 그래서 더 일찍 해가 지는 것 같은 시골의 밤에는 할게 아무것도 없다.
혹시나 해서 30분 거리의 치킨을 배달했더니(배달이 되는 게 신기했다. 역시 우리는 배달의 민족이다)
깜깜한 어둠 속을 뚫고 배달 온 현지인도 여기가 대체 뭐냐고 되묻는 그런 오지 아닌 오지이다.
황토방 내부(파노라마샷)
첫인상부터 '맘씨 좋은 사람'임이 느껴지는 주인 내외분의 정갈함이 숙소 내외부 곳곳에서 느껴진다.
도어록도 열쇠도 없는 문고리 손잡이부터 숙소 곳곳의 소품이나 인테리어에는 주인 내외분의 손재주와 꼼꼼함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한옥에서 느껴지는 외풍도 없었고, 뜨뜻한 게 좋다고 했으니 '어디 있는 동안 제대로 구들장의 위력을 느껴봐라'라는 심정으로 장작을 때셨는지 오전까지 절절 끓는 구들장은 몸을 이리저리 옮겨 누워야 할 정도여서 굽었던 허리와 어깨도 저절로 노골노골하게 펴지는 것 같았다.
숙소 바로 앞 평상에서 보이는 서창저수지
이곳에선 때 되면 밥을 챙겨 먹는 것 외에는 할 것이 없다.
날이 좋다면 서창저수지 뷰의 평상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멍 때리는 것이 유일한 낙일 것이다.(사실 이번 여행은 이게 다했다.)
바로 앞에 펼쳐진 서창저수지를 식후에 가볍게 거닐어 보고자 나간 산책길은 숲길, 논길, 들길을 만들고 헤치고 헤매면서 돌고 돌아온 고된 산책이 되었다.
그나마 유일한 놀거리 볼거리라 생각했었는데 전혀 개발도 관리도 되지 않은 상태이다.
다행히 주인장 얘기로는 영암군에서 서창저수지 둘레길 조성을 위한 조사는 마쳤고 조만간 수변 데크길이 만들어진다고 하니 혹시 다음에 찾았을 때에는 아침 안개나 낙조를 느끼며 수변에 드리운 나무와 꽃들 속에서 계절과 자연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가 된다.
주인 내외분이나 단체가 묵는 것 같은 본관(?)
'아다마'는 '흙'이라는 뜻의 히브리어라고 한다. 범상치 않아 보이는 주인 내외분의 소양이 느껴지기도 하면서 민박의 느낌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작명이다.
홍보가 안돼 손님이 없다는 말이 안타깝긴 하지만 정작 소문이 나서 예약이 힘들어지면 어쩌나 하는 이기적인 생각이 겹쳐지게 된다.
심신이 지쳤을 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세상과의 느슨한 단절이 필요할 때 다시 이곳이 생각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