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 6두품의 살풀이 시작

고등학교 수학의 첫 페이지를 펴다

by 암사자


이번 시작도 미약하였다. 나의 모든 시작이 그러했듯이.


영어 사교육 강사로 일한 n년 차, 가장 바쁜 때는 역시 내신 대비 기간이고 그 와중에 가장 곤란하고 비굴해지는 때는 보충수업 시간을 짤 때이다. 이때가 되면 과목의 서열, 즉 학생들이 생각하는 과목의 중요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수학 학원 가야 돼서 그 시간은 안 돼요. 영어 정규수업 빠지고 수학 보충 가면 안 되나요? 수학, 수학, 수학…


물론 나는 쿨한 선생이므로 감히 내 과목보다 다른 과목이 더 중요하다고 해? 류의 꼰대 같은 생각은 하지 않는다. 영어보다 수학 공부가 덜 되어 있다고 생각하니?라고 묻고 그렇다고 생각하면 바로 보내준다. 단, 영어도 어느 정도는 하는 학생의 경우에만 말이다.


공부가 그렇다. 아니, 세상 모든 것이 그렇다. 달리기를 못하는 내가 축구를 잘할 리가 없듯이, 수학 공부가 덜 되어 있는 학생은 영어 공부도 덜 되어 있다. 그냥 시간 관리가 잘 안 되는 학생인 것이다. 영어 수업을 성실히 듣고 영어 숙제를 꼬박꼬박 하는 학생이 시험을 목전에 두고 수학 때문에 발을 동동 구를 리가 없다. 그런데 나는 오랜 시간 이 당연한 사실에 확신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학교 다닐 때 수학을 못 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과목이 전부 100점이니 못한다는 수학도 그렇게 못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라떼도 수포자라는 단어는 있었지만, 어떤 한 과목을 포기할 수 없는 성적 대였다. 그래서 수학을 놓지 못하고 질질 끌려다니며 내 자존감과 자신감을 다 잃어버렸다. 나는 고등학교 3년 내내 내 머리의 한계와 학생으로서의 내 계급에 대해 생각했다. 수학 못 하면 6두품이지. 같은 최상위권에 있어도 과목별 성적 분석해 보면 다 나온다. 성골들은 모든 과목을 만 점 가까이 받는 애들이고, 진골은 골고루 못하는 게 없는 애들이라면, 6두품은 신라 하대 신분 혁명이 일어나 진골왕의 시대가 와도 절대 어느 선을 넘어설 수 없어. 수학 때문에 1등이 안 되는 나처럼.


수학은 내게 넘어설 수 없는 장벽이었다. 한 문제를 몇 시간이고 붙잡고 있으면 답이 보인다고 해서 5시간 동안 한 문제를 쳐다본 적도 있었지만 흰 종이에 그려진 검정색 무늬일 뿐이었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학에 철저히 졌기 때문에, 나이를 이렇게 먹어서도 수학은 어렵고 먼 존재였다. 그래서 애들이 영어는 쉽지만 수학은 중요하고 어려워서 수학학원이 우선이라고 했을 때 나는 깨깽하는 마음으로 보내주어야 했다. 한 5년 정도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끊임없이 책 읽고 공부하는 성인 학습자였다. 뇌의 가소성에 대해 많은 책을 읽고 그에 대한 확신이 생기자, 마음속에서 수학에 대한 저항심이 고개를 들었다. 수능 수학 정도는 타고난 재능의 영역이 아니야. 수능 영어가 그렇듯이. 어차피 애들이 하는 건데, 내가 쫄아서 문제 앞에서 얼어버렸던 건 아닐까? (나는 그 후에도 다른 분야에서 종종 얼고 굳었다. 나는 전혀 담대한 사람이 아니다.) 야, 너 진짜 내가 넘을 수 없는 골품의 벽이야?


그날로 중학교 1학년부터 3학년까지의 수학 책을 왕창 사다 쭉 풀었다. 술술 푼 최소공배수 파트에서 50점을 맞긴 했지만, 학교 다닐 때 수학이 주던 위압감은 어디에도 없었다. 분명 중학교 때도 수학 못 해서 온갖 어른들한테 혼났는데? 중학교 수학을 다 풀고 나서 내가 느낀 바는 이렇다.


1. 쉽다.

중학 수학이 중학 영어보다 쉽다. 중학 수학을 잘하기 위해서 해야 하는 공부의 양이 중학 영어를 위한 공부의 양보다 현저히 작기 때문이다. 당연하다. 원리를 알면 그다음부터는 파인 튜닝만 남은 거니까. 그동안 괜히 쫄아서 땡땡이치고 싶은 애들 핑계에 넘어가 준 걸 지도…!

2.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중학교 때 중학 수학은 ‘오늘 삼켜야 할 쇠 막대기’ 같은 것이었다. 무슨 맛인지도 모르겠고 삼키기도 고역이지만 오늘 하루 이만큼은 삼켜야 괜찮은 어른이 될 수 있단다. 못 삼키면 엄마랑 수학 선생님한테 죽는 거야. 흑흑. 네 삼켰어요. 그런데 성인 학습자인 내게 수학은 그런 아무 맛도 의미도 없는 덩어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문제마다 내게 질문을 던졌다. 이거 왜 배우게? 이거 결국 뭐에 대한 문제게? 놀라운 건 30대의 내가 그 답을 안다는 것이었다. 세상을 개념화하는 법을 배우는 거구나. 야, 이거 재밌다.


3. 생각이 정리된다.

원래는 딥펜에 잉크를 찍어 글씨를 썼다. 그런데 잉크를 매달 10만 원어치를 사도 색에 대한 갈망이 채워지지 않았다. 산더미처럼 쌓인 잉크병을 보며 딥펜 글씨 쓰기에 대한 열망이 식고 난 후 다시 찾아온 조용하고 단정한 취미가 수학 문제 풀기였다. 책상 위에서 고요하게, 나와 책과 노트와 샤프 만으로 시간이 가고 머릿속이 정리되었다. 생각이 심플해졌다. 성취감은 덤이었다.




중학교 3년 치의 수학을 뗀 후, 수학도 질려서 다른 취미로 옮겨갔다. 그렇게 2년. 직장을 옮겨 고등부만 맡던 내가 중등부 전임강사가 되었다. 여전히 학생들은 수학학원을 가야 한다며 영어 수업을 빼달라고 하곤 했다. 게다가 수학은 재미있는데 영어는 왜 이렇게 재미가 없냐고, 왜 이렇게 외울 게 많냐고 투덜거렸다. 나는 그런 아이들에게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중학교 수학은 쉽잖아. 내가 최근에 다 풀어서 알 거든. 쉬우니까 재밌게 느껴지는 거야. 영어가 더 어려우니까 영어에 시간 투자하렴. “


그런데 이 중학교 2,3 학년 아이들에게는 이 말이 통하지 않았다. 저 고등학교 수학 하는데요? 중학교 수학 누가 해요? 그건 쉽죠, 제가 하는 건 어려운데요? 자칭 수학 영재들이 피식피식 웃으며 중3 수학에서 멈춘 나를 놀리며 파티가 열렸다. 쌤, 싸인 30도 알아요?


왜 고등학생들에겐 중학교 수학 풀어서 안다는 말이 통하는데 중학생들에게는 오히려 통하지 않을까? 고등학생들은 어려운 공부에 부딪혀 겸손해져서 그렇다. 실제로 고등학생들은 선생이 매니큐어만 직접 발라도 대단하다고 해 준다. 자기가 매니큐어 회사 정도는 차리고도 남을 거라고 믿는 중학생들과는 다르다.


그래서 2년 만에 수학 책을 왕창 주문했다. 고등학교 수학 상, 하, 수학 1, 수학 2, 미분과 적분, 확률과 통계. 교육부 검정 교과서 일체와 수학의 정석을 한 번에 구매하며 또 한 번 느낀다. 애새끼들아, 이것이 어른의 경제력이다!


오로지 우리 중딩들을 말싸움에서 이겨서 선생의 권위를 되찾고 영어 보강 시간을 늘리기 위해 수학 공부를 시작한다. 끝엔 뭐가 있을지 지금의 나로선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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