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장.집된장.집간장
마당 한쪽 끝, 작은 계단을 두어 칸 올라가면
붉은빛을 띠며 햇살을 머금은 크고 작은 항아리들이
나란히 줄지어 서 있었다.
언제 보아도 그 모습은 꼭 오래된 시골 풍경화 같았다.
그 속에는 친정엄마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고추장, 집된장, 집간장이
해마다 계절을 지나며 깊은 맛을 간직한 채 들어 있었다.
뚜껑을 열면 장냄새와 함께
묵은 시간들이 스르륵 올라와
어릴 적 기억까지 한꺼번에 퍼지는 곳.
그곳이 바로 우리 집 장독대였다.
어릴 때 엄마는 늘 같은 말투로 심부름을 시키곤 했다.
“국그릇 하나 들고, 수저도 같이 챙겨.
고추장 좀 퍼와라. 된장도 조금.”
나는 작은 국그릇을 들고 장독대 앞에 서서
뚜껑을 살며시 열어보곤 했다.
햇빛을 받아 윤기가 흐르던 장을 볼 때마다
이게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는 걸
어린 마음에도 어렴풋이 느꼈다.
우리 가족이 하루를 버티게 하는 힘,
엄마의 손길과 시간까지 담긴 무언가라는 생각.
그리고 마지막에 엄마가 꼭 하시던 말.
“푸고 나면 꼭꼭 눌러서, 가지런히 이쁘게 해놔.
장도 사람 마음이랑 똑같아.
정리해주면 더 맛이 좋아져.”
그 말이 나는 참 오래 기억에 남는다.
그때는 왜 장을 ‘이쁘게’ 해놔야 하는지 몰랐지만,
지금은 조금 알 것 같다.
삶도, 사람의 마음도
막 퍼내고 어질러진 채 두면 금방 상하지만
다시 가지런히 눌러놓으면
새로운 마음으로 맛을 낼 수 있다는 것.
장독대 앞에서 자라며
나는 '정성'이라는 말을 배우고,
‘마음의 모양’이라는 것을 배웠다.
어른이 된 지금도
때때로 마음이 흐트러질 때면
문득 장독대가 떠오른다.
엄마가 장을 다독이던 손길처럼
내 마음도 잠시 눌러 정돈하고
다시 이쁘게 살펴봐야 한다는 걸
그 장독대가 조용히 알려주는 것만 같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그 항아리들 사이에 서 있던
햇살, 냄새, 엄마의 목소리는
여전히 내 삶의 가장 따뜻한 풍경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