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을 들면 마음이 말을 시작한다

마음은 말이 많지만, 입보다 펜이 더 잘 듣는다

by 애나 강



습관처럼, 저녁 9시가 되면 나는 조용한 공간을 찾는다.
하루가 다 소진된 시간, 가족이 모두 잠들거나 조용해지는 그 틈에
불을 조금 어둡게 낮추고, 작은 스탠드 하나를 켠다.
그 불빛 아래에서 스마트폰을 천천히 내려놓는다.
자꾸만 손이 가던 화면과 잠시 이별하고,
하얀 노트를 조심스레 펼친다.
그리고 천천히, 나에게 말을 건다.

“오늘 어땠어?”
“왜 그 말에 그렇게 상처받았니?”
“그래도 잘 버텼어. 고마워, 오늘도.”

이 짧은 인사들은 마치 마음의 문을 여는 암호 같다.
하루 종일 외부의 말들에 시달리던 내 마음은
이 순간에서야 비로소 본래의 목소리를 낸다.
누군가에게 털어놓기에는 부끄럽고,
말로는 도무지 설명되지 않던 감정들이
펜 끝을 타고 서서히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어색했다.
뭘 써야 할지 몰라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글이 나를 먼저 데리고 가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문장은 어렵지 않았고,
생각보다 내 마음은 이야기하고 싶은 게 많았다.

하얀 종이 위에서는
굳이 조리 있게 말하려 애쓰지 않아도 괜찮았다.
문법을 틀려도, 말이 중간에 끊겨도,
누군가 이해하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이 글은 나를 위한 것이니까.

내가 쓴 문장들은 나를 위로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나를 다독이는 방식이었다.
어딘가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지만
방법을 몰라서, 혹은 용기가 없어서
혼자서 꾹 참아야 했던 마음들이
글이라는 작은 틈을 통해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무언가를 쓰고 나면
마음속 무게가 조금 가벼워졌다.
울컥하는 감정이 정리되었고,
혼란스러웠던 하루가 차분히 되돌아보였다.
가끔은 그 속에서 나도 몰랐던 내 마음을 발견하기도 했다.

글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글은 꾸미지 않는다.
글은 가만히 귀 기울여준다.

매일 밤, 그렇게 펜을 들고 나와 마주앉는 이 시간이
점점 내 하루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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