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평일 오후처럼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사무실 시계는 달팽이처럼 기어갔고, 나는 오후에 상사가 내린 지시에 부당함을 느끼면서 작은 불평을 되뇌이고 있었다. 그러다 퇴근 즈음 갑자기 슬픈 소식을 전해 듣게 됐다. 아직 젊디 젊은 지인이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 몇 년을 병마와 싸워왔지만 결국 어린 아들을 남기고 마지막을 앞두고 있다는 것이었다.
가슴이 덜컹 내려 앉았다. 지금 사무실에 앉아 있고 살아 숨쉬고 있는 나의 행복을 나는 얼마나 가볍고 우습게 취급했었나. 멀쩡한 음식을 쓰레기통에 버리려다 들킨 것만 같은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십수년 째 싸워오는 밥벌이의 권태로움과, 신발 속 돌멩이처럼 일상을 괴롭히던 작은 불평불만들이 한순간에 복으로 돌변하여 벚꽃처럼 하늘에서 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빗속에서 빗물을 받겠다며 바가지를 거꾸로 들고 서있는 사람이었다. 매일 살아 숨쉬는 일상의 복이 하늘에서 내려도 거꾸로든 바가지로는 한 방울도 받을 수 없다.
이튿날, 오후에 하릴 없이 휴대폰을 뒤지다 또다른 비보를 들었다. 젊은 도반의 배우자가 사고로 유명을 달리 하셨다는 소식이었다. 뉴스에서 아나운서가 사명 ㅇ명, 중상 ㅇ명 하고 건조하게 읊어대는 사고 소식들은 그냥 지나치곤 하면서, 이렇게 죽음이 가까이에 늘 존재하고 있었음을 느낄때는 잠시 영혼이 두려움에 진동하는 것을 느낀다. 죽음이 두려운 걸까, 언젠가 반드시 끝날 삶을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에 두려운 걸까? 누구에게나 반드시 한번은 공평하게 찾아올 결말 앞에,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또다시 던지게 된다.
인간이 서로 싸우고 죽인 이야기로 가득한 세계사를 공부하고 문득 돌아서서 들은 자각이 있었다. 이 엄청나고 대단한 인류 역사의 이야기 끝에, 단 한명도 죽음을 피해 여지껏 살아 남은 사람은 없다는 사실이었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 마치 새로운 발견처럼 뼈아프게 다가왔다. 내가 목숨처럼 사랑한 사람도, 미워서 하늘이 언제 데려가나 한 사람도,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도, 맞이하게될 이 여정의 궁극적인 물리적 결말은 같다는 당연한 사실. 가끔은 너무 자명한 진실이 목을 메이게 한다.
결국 끝나지 않는 영화는 없다. 30분짜리 단편 영화이건, 3시간짜리 대서사 영화이건, 언젠가는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이름이 올라가는 자막을 보러 영화관에 가는 것은 아닐테니, 결국 중요한 것은 영화의 메세지, 그리고 각 장면이 관객에게 주는 느낌일 것이다.
나는 인생이라는 영화의 감독이자 유일한 주연배우로서, 어떤 영화를 찍고 있는가? 러닝타임은 내가 정하지 못하지만, 어떤 장르의 영화를 만들어 어떤 장면들로 채워 나갈지는 내가 정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끝나고, 함께해준 이들의 이름이 스크린 위에 올라갈 때, 어둠속의 객석에서 홀로 앉아 그 이름들을 바라보며 썩 괜찮은 영화였다고 작게 끄덕일 수 있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