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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radbury Apr 16. 2024

합작의 습관

우리 안엔 아직도 그 합작의 습관이 유전되어 오고 있다.

    근래에 보기 드문, 훌륭한 합작품이었다. 국립창극단의 <패왕별희>. 얼핏 제목만 들으면 중국의 전통극인 경극으로 착각할 수 있지만, 이 작품은 경극과 창극이 합쳐진 새로운 형태의 예술이다. 재빠르게 눈으로 출연 배우들의 이름부터 훑었다. 그런데 여주인공인 우희 역을 맡은 배우의 얼굴이 낯익었다. 그는 내가 평소 눈여겨보았던 국악인이었다. 경극의 특성상 남자 배우가 여장하고 무대에 서기 때문에 난 그의 새로운 변신을 서둘러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였을까? 내 마음은 벌써 빈 무대 위로 올라서고 있었다. 

    예전에 한창 세계 각국을 대표하는 전통극을 찾아 기웃거릴 때, 유일하게 포기한 게 경극이었다. 중국인들도 알아듣기 힘들다는 경극 언어에서 이미 한쪽 무릎을 꿇었고, 극을 더 아름답게 포장해줄 배경, 무대 장치가 없다는 점에서 나머지 무릎마저 꿇어버렸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경극이 창극의 옷을 입었다. 노래 또한 우리에게 익숙한 창으로 들으니 대사가 귀에 쏙쏙 잘 들어올 뿐 아니라 어깨까지 흥겹게 들썩였다. 경극의 화려하고 절도 있는 동작과 국립창극단의 세련된 무대 장치, 노련한 배우들의 연기까지 합쳐져 극의 몰입도를 더했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건 곧 협력하는 특성을 보였다는 뜻이다. 홀로 일하기보단 함께 일하기를 즐겨 하고, 힘을 합쳤을 때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었던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걸 일찍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주위를 둘러보면 꽤 많은 합작을 볼 수 있다. 자동차 회사와 자율 주행 솔루션 회사가 미래형 자동차를 생산하고, 애니메이션 영화사와 패션 브랜드가 한정판 상품들을 만들어내며 게임 회사와 드라마 제작사가 드라마 이야기를 연결한 게임을 탄생시킨다. 그뿐만 아니라 국가와 국가 간에도 기술, 스포츠, 경영, 문화, 예술 합작이 끊임없이 이루어진다. 이로써 외교에서도 좋은 관계의 성과를 내기도 한다. 둘의 장점이 합쳐지니 결과물 또한 참신하고 풍부해진다. 시너지 효과의 극대화가 이루어진 셈이다. 

    인간의 역사는 이런 과정을 통해 서로의 몸을 붙여가면서 발전해 왔다. 외부와의 교류를 빨리 시작한 나라들은 자신들의 전통 위에 새로운 방식과 시도를 덧붙여 또 다른 형태의 전통으로 변화 시켜 나갔다. 가부키의 화려한 무대 장치 기술은 당시 일본인들의 기술이 아니었다. 서역에서 들여온 기술이었다. 그들은 가부키에 이 기술을 접목시키면서 한층 발전된 극을 재창조해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던 그 옛날에도 무대 아래에서 직접 사람이 돌리는 동력을 이용하여 무대가 돌아가고, 뒤집어지거나 다시 나타나기도 했다. 그것은 지금 봐도 매우 신기하고 놀랍다.  

    하지만 합작의 결과가 늘 아름답고, 훌륭한 것만은 아니다. 김일성과 스탈린, 마오쩌둥의 합작은 우리 민족의 허리를 끊는 아픔을 남겼고, 히틀러와 하인리히의 합작은 육백만 명의 유대인들을 살육 공장으로 밀어 넣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인류 최초의 합작품은 ‘죄’다. 그러니 어쩌면 합작의 기원은 악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로 인해 지금도 이어지는 남자와 여자의 합작품은 우리들이다. 지구상 현존하는 육십억 인구가 그 결과물이다. 우리 안엔 아직도 그 합작의 습관이 유전되어 오고 있다. 몸에 새겨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문신처럼 우리의 유전자에 깊이 박혀 있다. 그리고 그 습관은 우리로 인하여 태어날 모든 미래 인류에게도 그러할 것이다. 

    더 과거로 가면 어떨까? 되도록 더 오래된 과거로 가 보자. 인류가 존재하지 않았던 미지의 시간까지. 그곳엔 또 하나의 합작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성경의 첫 구절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히브리어로 단수형이 아닌 복수형, 엘로힘으로 표기된다. 창조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합작이다. 인간의 합작품은 죄였지만, 하나님의 합작품은 아름다운 하늘과 땅, 꽃과 나무, 각종 동물과 해, 달, 별들 그리고 우리 인간이었다. 합작의 근원이 여기에 있기에 우리의 인생이 비극에서 해피엔딩을 기대할 수 있는 게 아닐는지.

    우희는 낙심하는 항우를 위해 검무를 춘다. 둘은 이미 한나라 군대에 몇 겹으로 포위된 지 오래다. 우희의 칼은 모였다가 흩어지고, 흩어졌다가 다시 모인다. 그 둘이 함께 만들어온 수많은 합작품, 전쟁에서의 승리도 사랑도 이젠 운명을 다해가는 듯하다. 사면에서 초나라 노래가 들려온다. 자신들의 본향 노래가 사방에 울려 퍼진다. 죽음이 가까워지는 걸 예감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우희는 사랑을 위해 자신의 목을 벤다. 항우 또한 결국 오강을 건너지 못하고 그녀의 뒤를 따른다. 비록 항우와 우희의 사랑, 초나라의 운명은 비극으로 끝났지만, 무대 위의 배우들에겐 큰 박수가 쏟아진다. 우리의 전통을 오롯이 살려내면서도 경극과의 합작이라는 새로운 시도와 도전을 잘 넘어섰다. 이번 합작은 완벽했다. 

    컴퓨터를 켜고 내 안에 숨어있던 합작의 습관을 끄집어낸다. 그리고 오늘은 또 어떤 새로운 소재와 함께 작업해 볼까 기대하며 자판을 두드린다. 합작의 완벽한 성공을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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