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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radbury May 21. 2024

행운을 빌어요

그런데 그다음 줄은 심지어 ‘Good luck!’이라니.

  장보고 나오니 와이퍼에 하얀 종이가 꽂혀 있었다. 작은 메모지엔 영어 필기체로 세 줄의 글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글씨체가 심하게 흔들렸기 때문이다. 제대로 보이는 건 첫째 줄의 ‘You have a low...’와 둘째 줄의 ‘Pass...’ 그리고 셋째 줄의 ‘Good Luck!’이었다. 

  첫 번째 줄을 읽으며 바퀴 바람이 빠졌다는 건가 했는데 아무리 봐도 ‘low’ 옆의 글자가 ‘tire’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것은 오히려 ‘real’에 가까웠다. 둘째 줄도 가만히 보니 ‘Pass line’처럼 보였지만, 그것도 ‘line’이 맞는지 정확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다음 줄은 심지어 ‘Good luck!’이라니. 나만 그런가 싶어 딸에게도 보여줘 봤지만,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었다. 

  그때부터였다. 내 정수리에 싹이 트기 시작한 건. 그 싹은 점점 자라 금세 나무의 모양을 갖춰갔다. 그리고 앙상한 가지 하나가 오른쪽으로 사선을 그으며 쭉 뻗어 나왔다. 이것은 분명 노인의 글씨체다. 바싹 말라 손가락마저 잘 굽어지지 않는 손이 글씨를 써나갔다. 노인은 흔들리는 손을 제어하려 펜대를 꽉 잡고 메모지에 집중했을 것이다. 

  두 번째 줄을 읽기 시작했을 때, 또 하나의 굵은 가지가 왼쪽으로 퍼져 나갔다. ‘Pass line’이라고 썼다면 혹시 내가 선을 넘겨 차를 세웠다는 건 아닐는지. 물론 문법에 맞지는 않지만, 영어에 서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뒀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몹시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이미 집에 돌아와 버려서 차를 어떻게 세웠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지만, 만약 선을 조금 넘었다고 할지라도 그게 메모를 남길 정도로 심각한 일인가. 두 번째로 뻗은 굵은 가지는 다시 양쪽으로 검은 실가지를 냈다. 주차에 대해 불평했다면 노인은 분명 남자일 것이다. 그리고 메모까지 남긴 걸 보니, 그는 온갖 참견을 다 하는 깐깐한 할아버지일 거로 생각됐다. 

  세 번째 줄로 내려가자, 나무는 또 다른 어그러진 가지를 위로 밀어냈다. 깐깐한 할아버지는 내 차 옆에 주차했다. 그리고 내리려다 보니 내 차가 선을 넘어 문 열기가 불편했다. 이 상황을 절대 그냥 넘길 수 없다고 생각하며 차 안에서 메모지를 찾았다. 그리고 한 장 찢어 ‘넌 주차선을 넘었어.’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다른 차들이 문을 열다가 내 차를 확 찍어 버리길 바랐다. 그 생각 끝에서 ‘행운을 빈다!’라며 조롱 조로 마지막을 장식했다. 정말 고약한 할아버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나무는 온몸을 부르르 떨며 사방으로 검은 가지를 냈다. 

  남편이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난 생각의 뿌리를 더 깊숙이 박고, 하늘이라도 뚫어 버릴 기세로 가지를 뻗어냈다. 그런데 혼자 씩씩거리던 날 보며 남편이 말했다. 

  “당신 차 바퀴에 바람 빠졌던데. 못이 박혔어. 일단 스페어타이어로 갈아 끼우고 올게.”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검은 가지는 절인 배추처럼 숨 죽어 꺾였다. 깐깐한 할아버지는 사라지고, 바쁜 시간에도 메모를 남기고 간 온화한 할아버지만 남았다. 눈 끝을 사정없이 찢어 올리던 마음이 등 뒤로 슬쩍 숨었다. 

  작년 봄, 10종 모둠 쌈채 씨앗 봉지를 뜯어 긴 화분에 뿌렸다. 그리고 햇볕 잘 드는 자리에 두고 매일 물을 줬다. 시간이 지나자 작은 싹이 흙을 뚫고 머리를 내밀었다. 너무 작아 자세히 들여다봐야 했지만, 확실히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자라고 있었다. 비슷하게 보이는 그것은 싹이 자라며 드디어 정체를 드러냈다. 사람도 그 안에 저마다 다양한 생각을 섞어서 심는다. 씨앗이었을 때는 서로의 정체를 숨기고 있지만, 치커리 같은 생각은 쓴맛을 품으며 자라고, 겨자채 같은 생각은 매운맛을 품으며 자란다. 원치 않는 싹을 키웠다가는 훗날 입에 넣으며 얼굴 찌푸릴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선한 마음이 자라 나무에 꽃을 피웠다. 그리고 이제 그는 흔들리는 손으로 마지막 줄을 적어 넣는다. 행운을 빌어요. 머릿속 깊이 박힌 생각의 뿌리를 뽑고 나니 지끈거리던 정수리가 산뜻해졌다. 드디어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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