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오브 인터레스트>,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안의 홀로코스트

by 조조

영화보다 먼저 본 건 감독의 수상 소감이었다. 손을 덜덜 떨며 유대인의 정체성과 홀로코스트가 전쟁에 오용되는 것에 반대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만든 영화가 궁금했다. 상영관은 적었고, 오전이나 늦은 밤에만 상영관이 있었다.

존오브인터레스트.png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한 장면, 가족들이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 ⓒA24

영화는 한 가족의 일상을 보여준다. 가족은 아주 평범하다. 그들의 꿈은 적당히 출세해서 마당에 수영장과 꽃밭을 가꾼 넓은 집에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다. 그 꿈은 오랜 노력 끝에 이루어져 그들에게 아주 소중하다. 출세하기 위해 희생을 짊어지는 사람들을 모른 체 한다. 그런 모습은 지극히 평범하다. 우리와 닮아있고, 그 지점이 우리를 소름돋게 한다. 그들은 홀로코스트 가해자다.


가장인 루돌프는 홀로코스트의 소장이다. 그는 어떻게 효율적으로 홀로코스트에 수용되는 유대인을 죽일 건지를 매일 고민한다. 효율적이고 열정적으로 많은 유대인 수용자를 ‘제거’한 것을 상부에 인정받는다. 그의 노력은 홀로코스트 수용자에게 잔혹하지만, 그는 아이들과 놀러간 계곡에서 홀로코스트의 시체가 떠내려오면 혹여나 아이들이 보게 될까 걱정하는 자상한 아버지이다. 밤이 되면 유대인 여성을 불러들여 관계를 맺고 더럽다는 듯이 몸을 깨끗하게 씻어내는 그는 자기 전 아내와 담소를 나누는 다정한 남편이기도 하다.


아내인 헤드비히도 그에 어울린다. 헤드비히는 홀로코스트 바로 옆 주택을 아름답게 가꾼 이 가정의 진정한 주인이다. 헤드비히의 꿈은 오로지 그 아름다운 저택에서 자신의 성공을 인정받으며 남은 생을 잘 보내는 것이다. 그런 헤드비히의 어머니는 유대인의 비명이 매일같이 들리는 집에서 지내는 걸 불편하게 느껴 쪽지 한장을 남기고 떠나는데, 헤드비히는 어머니가 자신의 성공한 삶을 인정하지 않는 것에 분노하며 그 쪽지를 아무렇지 않게 버린다. 그리고 자신의 집에서 일하는 유대인들에게 분풀이를 한다. 너희 같은 건 얼마든지 불태워 죽여버릴 수 있다고. 그는 그렇게 자존감을 세운다.


루돌프와 헤드비히의 ‘작은’ 이기심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변주되고 있다. 청년들은 일터에서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거나, 취업 자체를 포기 하지만 공직자들은 자기 자식에게 말도 안되는 가짜 스펙을 쌓아 길을 닦아준다. ‘자식한테 이 정도는 해줄 수 있다’는 마음이 크게 이기적인 것도 아닐 것이다. 비단 기성 세대만의 문제도 아니다. 인천국제공항에서 비정규직 직원들을 정규직 전환하던 때에 대학을 졸업한 청년들은 그들의 정규직 전환이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기존에 일하던 비정규직 직원들이 고졸이었기 때문이다. 장애인들의 대중교통 시위를 생각해보자. 그들은 평생동안 장애가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딘가에 갈 자유를 박탈당했다. 그 권리를 보장받으려는 시위에 대고 ‘직장인들의 출근 길을 방해하는 민폐’라고 말하던 목소리를 기억한다.


더 소박하고 평범한 일상에도 악은 있다. 긴 줄을 서기 귀찮으니 새치기를 하고, 쓰레기를 들고 다니기 성가시니 길에 버린다. 마트의 카트를 쓰고 제자리에 가져다 놓는 일은 번거로우니 그냥 아무데나 세워둔다. 지나가던 사람이랑 부딪치면 기분이 나쁘니 욕을 내뱉으면 된다. 우리는 그럴 수 있다. 그 뒷일을 상상하지 않으면 되니 간단한 일이다. 내게 새치기를 당하는 사람의 감정이나, 쓰레기를 줍고 카트를 정리할 사람의 수고로움을 상상하지 않으면 삶은 훨씬 편리해진다. 아무렇게나 감정대로 행동하면 다른 사람들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


악이라 부르는 것들은 이렇게도 쉽다. 우리는 어떤 원대한 계획과 의지로 ‘악’이 행해진다고 착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그냥 새치기를 하는 마음으로, 길에 쓰레기를 버리는 마음으로, 그 약간의 이기심으로 학살은 일어난다. 그들은 악에서 무언갈 찾은 게 아니다. 그저 게을렀을 뿐이다. 자신의 행동으로 타인이 입게될 불편과 불행을 상상하지 않았을 뿐이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상상력과 품위를 유지하려는 인간의 의지가 부재한 그 순간이 바로 악이다.


‘악이 거기 있었다’라고 말하는 영화들과 이 영화는 다르다. 이 영화는 ‘악은 우리 안에 있다’고 말한다. ‘이 정도는 나를 위해도 된다’거나 ‘이 정도는 이기적이어도 된다’는 말을 스스로에게 했던 순간들이 뒤틀린다. 그 잠시의 도덕적 나태함은 우리보다 약한 누군가를 좀먹었을 것이다. 불편하고 또 수고로운 일을 우리는 해야 하는 것이다. 밤이면 수용자들의 일터로 몰래 달려가 먹을 것을 숨겨둔 소녀처럼. 우리의 성실함이 부재한 곳에 악이 태어나지 못하도록, 우리는 사는 동안 질리도록 정의로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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