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된다는 것은

책 <인형의 집> 리뷰

by 조조

예전 회사에서 '회사에서 우는 것은 회사에서 사람들 앞에서 똥을 지리는 것과 같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때 그 말을 듣고 얼마나 남성적이고 근대적인 말인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세상에 울지 않는 사람은 없지만, 회사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된다면, 그때 이득을 보는 사람은 누굴까? 회사에서 어떤 사람을 울고싶을만큼 괴롭히는 사람일 거다. 그때 가장 손해를 보는 건 회사에서 가장 억울한 처지에 있는 사람일 거다.


여성은 남성보다 잘 운다. 감성이 풍부하다. 그런 것들은 언제나 여성이 얼마나 어린아이같은지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것인지 보여주는 하나의 서사로 이용된다. 어릴 때는 '여성스럽다'는 말이 싫어 감정표현을 숨기고 울음을 참곤 했는데, 그때도 여성스럽다는 말이 주는 수동적이고 대상화된 이미지를 어렴풋이 느끼고 기피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자치언론에서 어떤 영화를 두고, '남성 영화에서 주인공만 여성으로 바꿨을 뿐이다. 여성스럽지 않다'는 평을 하는 것을 들었다. 그때 처음 의식적으로 '여성스러운 것'을 추구할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세상이 만든 여성상을 다 없애버리고 싶었는데, 그래서 남자와 동등하게, 남자와 같게 살아가는 여성의 모습을 그리곤 했는데, 사실 그건 여성이 완전히 없어지므로써 하나의 성별만이 세상에 남아 평등해지는 디스토피아적 이상이었다는 걸 그 이후로 조금씩 깨달았다.


페미니즘을 접하고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나는 '여성스러운 것'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많은 것이 쌓이고 <바비>라는 영화를 봤을 때였다. 나는 나를 살렸던 다정함과 자상함에서 여성성을 발굴해냈다. 죽으려는 사람을 귀찮으리만큼 살려두려는 오지랖과, 질리도록 남을 챙기는 잔소리의 집요함과, 감정을 말과 행동으로 표현할 줄 아는 정교함 속에서 여성성을 발굴했다. 여성이 가진 요소들이 어떻게 세상에 스며들어있는지 다시 보았다. 선명하고 뚜렷하지 않아도 세상의 가장 밑바닥에서, 돌봄이 필요한 곳에서, 소외된 곳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여성성이 보였다.


세상이 나에게 이기라고 가르칠 때 내 안의 여성은 져줄 줄 알라고 했고, 세상이 나에게 터프하고 엄격해지라고 말할 때, 여성성은 날더러 유순하고 관용적인 사람이 되라고 했다. 나는 내가 여성이라는 것과 함께 2등 시민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고, 또 동시에 내가 부유해질 수 없고 그렇게 되는 것이 옳지도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였고, 고기를 먹는 게 더이상 즐겁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내게 여성이 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그래 마땅하다는 것이 아니고 내가 그런 여성이었다. 수많은 남성들이 자기자신이 되면서 자신이 어떤 남자인지를 정의하듯이 수많은 여성들도 자신이 되면서 자신이 어떤 여자인지를 정의해야 한다.


미디어에서 여성스럽다고 표현하는 것들은 치마를 입고, 가슴을 강조하고, 히스테리를 부리고, 다른 여자를 시기질투한다. 그렇게 여성스럽다는 표현은 세상이 가진 여성혐오를 그대로 덧입는다. 그래서 여자아이들로 하여금 그 혐오를 순응하거나 혹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여성이 되는 것을 거부하게 한다. 남자들이 만든 법과 남자들이 만든 사회에서 남자들의 입으로 말해지는 '여성'이 되거나 혹은 여성이면서도 '여성스럽지 않다'는 비난을 들어야 한다.


책 속 노라는 더이상 남자들이 만든 '여성'이기를 거부한다. 자신이 가꿔온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지만, 더이상 남의 입으로 정의되기를 원하지 않아 떠난다. 패배하게 되더라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 않는 세상과 대결하기로 작정한다. 노라가 집을 나간 이후 어떻게 되었을지를 상상하는 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노라만이 그 이야기의 뒷부분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노라가 재결합을 하였든, 가난한 삶을 평생 영위했든, 널리 말해지는 것처럼 창녀가 되었든, 그런 건 모두 남의 시선에 비친 노라일 뿐이다. 노라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오로지 노라에 의해서만 정의될 수 있다. 그 삶은 노라의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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