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성 그리고 '불행할 자유'

<멋진 신세계>를 읽고

by 조조

과학 기술아 발달한 미래, 아이는 유리병에서 유전자 조작을 통해 태어난다. 소마라는 약물을 통해 사람들은 쾌락을 느끼고 불행과 가까운 감정은 차단한다. 사람은 어느 한 사람의 소유가 될 수 없기에 장기적인 연애도 금지된다. 쾌락을 국가가 배급하는 사회에서 불행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미래에 대한 작가의 상상은 놀랍다. 하지만 과거의 것인만큼 한계가 있다. 부잣집에서 자란 백인 남성인 그는 자신이 기득권인 계급 사회와 가부장사회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는지, 까마득한 미래에서도 계급은 불평등하게 나뉘어 있고 여자는 2등시민으로 남자에 의해서만 정의된다.


그는 쾌락과 이성이 지배하는 미래 세상에 저항하는 인물 ‘존’을 통해 인간성과 자유에 대한 낭만을 강조하려 한다. 그러나 2026년을 살아가고 있는 여성에게 이 책은 정반대의 메시지를 전한다. 존이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들을 윽박지르고 타인을 칼로 찌르고 재단하는 모습은 더이상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는 신념에 불사해 폭력을 일삼고 여성을 성녀 혹은 창녀로 상징화하는 구시대적 남성성을 보여줄 뿐이다.


작가는 당대에 남성성이야말로 인간이 잃어선 안되는 인간다움으로 본듯하지만, 지금에 와서 존의 꽉 닫힌 신념은 위험해 보인다. 전쟁은 하나의 신념이 다른 어떤 가치보다 앞설때 일어난다. 그렇게 역설적으로 자유마저 전쟁의 명분이 될 수 있다. 당시 헉슬리가 주목한 것이 낭만을 쟁취하기위해 발악하는 인간상이었다면, 지금은 계속해서 타인에게 손내민 레니나의 모습을 포착하는 것이 문학적 시선이 아닐까.


존은 그토록 자유를 사랑했지만, '불행할 자유'를 말하던 그는 인생에 진정한 불행이 닥치자 마자 자살로 삶을 끝낸다. 그의 최후를 통해 불행을 진정으로 바라는 이는 없다는 확신을 얻을 뿐이다. 사실 불행은 자유의 부재이기에 그가 울부짖은 '불행할 자유' 따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존 같은 사람에게 사회의 복지는 감히 인간의 표준적 행복을 목표로하는 파시즘이겠지만, 실제로 사회의 복지는 인간이 '행복할 자유'를 보장한다.


계속해서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읽던 그는 사실 비극의 결말인 죽음을 갈망했던 건 아니었을까. 어떤 방식으로든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뭔지 결국엔 알았기를, 그리고 성취했기를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도시가 감춘 얼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