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를 활짝 펴고 똑바로 서야 하는 이유

에니어그램 x 조던 피터슨 큐레이션

움츠린 자들에게 — 에니어그램 움츠림형과 똑바로 서는 법



바닷속 가장 오래된 법칙

조던 피터슨은 『12가지 인생의 법칙』에서 하찮아 보이는 생명체, 바닷가재로부터 출발해 인생의 첫 번째 법칙을 설명한다. 바닷가재는 3억 5천만 년 전부터 지구에 존재해 왔다. 이는 6500만 년 전, 공룡이 나타나기도 전이다. 바닷가재는 그 긴 시간 동안 단 하나의 문제를 반복해서 해결해 왔다.


‘누가 가장 좋은 은신처를 차지하는가. 누가 먹이를 먹고 누가 물러서는가. ’


이 투쟁의 결과는 바닷가재들의 신경계에 새겨진다. 승리한 바닷가재의 뇌에는 세로토닌이 차오르고, 패배한 바닷가재의 뇌에는 옥토파민이 흐른다. 세로토닌은 위풍당당하게 몸을 펴게 만들고, 옥토파민은 몸을 위축되게 만든다. 그리고 위축된 바닷가재는 더 작은 공간에 숨어들며, 후줄근하고 무기력하고 위축된 모습을 보인다. 아주 약한 자극으로도 황급히 뒤로 물러서는 데 도움을 주는 꼬리 반응이 나타나는데, 이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는 군인이나 장기간 학대를 경험한 아동의 놀람 반사 실험과 거의 유사한 반응이다.


피터슨이 이 법칙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단순히 어깨를 피고 등을 스트레칭하라는 자세 교정이 아니다. 피터슨이 말하는 것은 훨씬 더 오래되고 보수적인 생물학적 진실이다. 계층 구조는 문화의 발명품이 아니다. 그것은 수억 년에 걸쳐 신경계 안에 새겨진 본능이다. 어떤 자세를 취하느냐는 단순히 생리학적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세상에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의 문제다.


오늘의 글은 에니어그램의 ‘움츠림형(Withdrawn)’에게 특히 도움이 될 이야기다. 에니어그램에서 4번, 5번, 9번이 속하는 이들은 공통적으로 세상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는 전략을 사용한다. 갈등이 감지되거나, 과도한 요구가 밀려오거나, 정서적으로 압도될 것 같은 순간에 이들은 전진 대신 후퇴를 택한다. 미성숙한 단계일수록 그 후퇴는 거의 반사적이다. 마치 반복된 패배 끝에 몸을 낮춘 바닷가재처럼, 스스로를 작은 공간 안으로 밀어 넣는 데 익숙해진다. 존재를 축소하면 안전해질 것이라고 믿는다. 드러나지 않으면 상처도 줄어들 것이라 여긴다. 그렇게 점점 더 조용해지고, 더 희미해지고, 더 안쪽으로 숨어든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길 바란다. 그렇다고 해서 공격형(Assertive)이 더 우월하다는 뜻은 아니다. 3번, 7번, 8번이 속한 공격형은 적극적으로 자아가 세상을 향해 나가지만, 그들 역시 과제가 있다. 지나친 추진력 속에서 자신의 감정적 취약함을 외면하거나, 관계의 미묘한 신호를 놓치거나, 멈추어 서서 내면을 성찰하는 능력이 덜 발달되어 있을 수 있다. 에니어그램은 어느 유형이 더 낫다고 말하지 않는다. 에니어그램은 성격을 위계로 배열하지 않는다. 대신 각 유형이 ‘가장 덜 발달된 측면’을 직면하도록 안내한다. 성장의 출발점은 이미 잘하는 것을 더 강화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불편해서 피하고 싶었던 영역, 어색해서 미루어 두었던 기능을 천천히 회복하는 데 있다. 따라서 에니어그램은 각 유형이 단계별로 보완해나가야 할 자신의 성격에서 가장 덜 발달된 측면을 다루는데서 수련을 시작한다.


에니어그램이 말하는 '물러섬'

에니어그램을 처음 접했을 때, 가장 겉으로 드러난 행동 패턴을 통해 비교적 쉽게 유형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바로 아홉 가지 유형을 세 가지 ‘호니비언 그룹(Hornevian Groups)’으로 나누어 보는 것이다. 이 구분은 정신분석가 카렌 호니Karen Horney의 대인관계 이론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사람이 스트레스 상황이나 관계의 긴장 속에서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초점을 둔다. 카렌 호니는 인간이 불안을 다루는 방식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했다.


첫째는 순응형(Compliant)이다. 1번, 2번, 6번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관계의 규범과 기대에 응답하며, ‘해야 한다’는 기준에 자신을 맞춘다. 갈등 상황에서도 기본적으로는 책임과 의무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둘째는 공격형(Assertive)이다. 3번, 7번, 8번이 포함된다. 이들은 욕구를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환경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조직하려 한다. 밀고 나가는 힘이 있으며, 상황을 주도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셋째가 바로 움츠림형(Withdrawn)이다. 4번, 5번, 9번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긴장과 요구가 커질수록 에너지를 안쪽으로 회수한다. 갈등을 정면 돌파하기보다 심리적 거리를 둔다. 참여 대신 관찰을, 개입 대신 후퇴를 선택한다


4번, 5번, 9번은 표면적으로는 매우 달라 보인다. 4번은 강렬하고 감정적이다. 5번은 냉철하고 지적이다. 9번은 따뜻하고 평화롭다. 그러나 이 다양한 모습 아래에는 하나의 공통된 대처 전략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세상과 직접적으로 맞부딪히는 대신, 자신만의 내면 공간으로 후퇴한다.


산드라 마이트리는 『완전한 에니어그램』에서 이 움츠림의 뿌리를 '본질(Essence)'의 상실로 설명한다. 우리가 진정한 자신, 즉 본질과의 연결을 잃어버렸을 때, 각 유형은 그 상실을 보상하기 위한 고유한 전략을 발달시킨다. 그리고 움츠림형의 전략은 '내면으로의 후퇴'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으로부터 물러서는가. 피터슨의 틀 안에서 말하자면, 그들은 계층 구조의 게임 자체(현실)로부터 물러선다. 그들은 경쟁하기를 거부하거나, 경쟁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거나, 혹은 경쟁이 자신에게 너무 위험하다고 느낀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에게 편한 방식으로 계속해서 후퇴한다면, 결과적으로 옥토파민의 논리가 작동하기 쉬워진다. 물러설수록 더 작아지고, 더 작아질수록 더 물러서게 된다.


만약 당신이 싸움에서 진 바닷가재처럼 축 늘어진 자세로 다니면 사람들은 당신을 지위가 낮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인간과 갑각류가 모두 가지고 있는, 뇌 속 가장 깊숙한 곳의 서열 계산기도 당신의 서열 순위를 낮게 평가할 것이다. 그러면 뇌에서 나오는 세로토닌의 양이 줄어든다. 행복감이 떨어지고, 불안감과 슬픔은 커진다. 당당하게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할 때 패배를 인정하고 뒤로 물러서게 된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고 최고의 기회를 얻으며 건강하고 매력적인 배우자를 만날 확률도 줄어든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어서 알코올을 남용할 가능성이 커지고, 심장 질환이나 암, 치매에 걸릴 가능성도 커진다. 어느 면으로 보나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 <12가지 인생의 법칙> 조던 B. 피터슨


4번 — 결핍의 신화를 살아가는 사람

4번 유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의 근본적인 믿음을 이해해야 한다. 리소와 허드슨은 4번의 핵심 두려움을 '정체성이 없거나 개인적인 중요성이 없는 것'으로 정의한다. 그들은 자신이 근본적으로 결핍되어 있다고, 혹은 다른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가지고 있는 무언가가 자신에게는 없다고 느낀다. 마이트리의 표현을 빌리면, 4번은 '나는 충분하지 않다'는 믿음 위에 자신의 세계를 건축한다.


이 결핍감은 도리어 4번을 내면으로 끌어당긴다. 그들은 자신의 내면세계를 극도로 발달시키고, 감정의 뉘앙스와 깊이를 타인보다 훨씬 예리하게 감지한다. 그들은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진정성을 갈망하며, 피상적인 것에 강렬한 혐오감을 느낀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스스로를 세상의 주변부에 위치시킨다. 자신은 다르다. 자신은 특별하다. 그리고 그 특별함은 고독과 함께 온다.


피터슨의 바닷가재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패배한 바닷가재는 자신의 패배를 단순히 전투의 결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패배는 신경계에 새겨지고, 다음 전투에서 그 바닷가재는 더 쉽게 물러선다. 4번의 비극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의 결핍감은 실제 결핍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느 시점에 형성된 믿음이고, 그 믿음이 현실을 만들어낸다. 자신이 부족하다고 믿기 때문에 앞으로 나서지 않고, 앞으로 나서지 않기 때문에 부족함이 확인된다. 악순환이 계속된다.


4번에게 피터슨의 첫 번째 법칙을 적용해 본다면 이런 의미가 될 것이다. 어깨를 편다는 것은 '나는 지금 이대로도 세상에 설 자격이 있다'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결핍이 채워진 다음에 나서는 것이 아니다. 결핍이 있는 채로, 그 모든 불완전함을 안고서, 이미 여기 있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마이트리가 말하는 4번의 '신성한 사고Holy Idea'은 '신성한 기원(Holy Origin)'이다. 모든 존재는 그 기원에서 충분하다. 결핍은 존재에서 기원한 것이 아니라 에고에서 기원한 것이다.


5번 — 관찰자의 유리벽 뒤에서

5번 유형은 어쩌면 에니어그램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물러서는 유형일 것이다. 리소와 허드슨은 5번을 '관찰자'라고 부른다. 그들은 세상을 이해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 이해는 세상에 직접 뛰어들어 얻는 것이 아니라, 안전한 거리에서 관찰함으로써 얻는다. 그들의 두려움은 세상이 자신을 침범하고, 자신의 에너지와 자원을 고갈시킬 것이라는 믿음에서 나온다.


5번의 삶의 방식으로 피터슨의 통찰을 적용해 보자. 패배한 바닷가재가 5번이라면, 그가 취하는 자세는 자신을 숨기는 것뿐 아니라 세상에 이러한 신호를 보내는 것과도 같다. '나는 위협이 되지 않는다. 나는 중요하지 않다. 나를 내버려 두라.' 5 번들은 눈에 띄지 않음으로써 세상의 요구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한다. 그들에게는 자신이 너무 많이 드러나면 주변으로부터 너무 많은 것이 요구될 것이라는, 그리고 자신에게는 그것을 감당할 자원이 없다는 뿌리 깊은 믿음이 있다.


5번의 핵심적 특징은 '인색함(Avarice)'이다. 이것은 단순히 집게사장처럼 돈에 대한 탐욕이 강하다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와 감정을 세상에 내어주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들은 지식을 축적하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기를 두려워한다. 그들은 세상을 이해하지만 그 세상에 실제로 참여하기를 유보한다. 관찰하는 것과 존재하는 것 사이의 간극이 그들의 삶을 특징짓는다.


내가 패배한 바닷가재의 교훈을 통해 5번에게 말하는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다. 이해는 참여를 대체할 수 없다. 완전히 준비가 되었을 때 세상에 나서겠다고 기다리면 영원히 세상으로 나아갈 수 없을 않는다. 왜냐하면 세상은 완전한 이해를 기다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바닷가재는 전투를 분석함으로써 승리하지 않는다. 몸을 세우고, 집게발을 들고, 공간을 차지함으로써 승리한다.


5번에게 어깨를 편다는 것은 '충분히 알지 못해도 뛰어들어보겠다'는 선언일 수 있다. 마이트리가 말하는 5번의 신성한 사고Holy Idea은 '신성한 전지(Holy Omniscience)'다. 세상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는 유리벽 뒤에서가 아니라 현장에서, 바로 이 순간 삶 속에 뛰어들 때 비로소 열린다.


9번 — 잠든 거인의 이야기

에니어그램 원에서 가장 위에 위치하는 9번 유형은 '화해자(Peacemaker)'라고도 불린다. 9번은 따뜻하고 수용적이며 편안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갈등을 싫어하고 조화를 사랑한다. 그러나 이 평화로운 표면 아래에는 에니어그램 전체를 통틀어 가장 깊은 형태의 움츠림이 숨어 있다. 9번이 물러서는 것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다.


피터슨은 복종적인 자세가 단순히 외부 세계에 보내는 신호가 아니라고 설명한다. 이는 자신의 신경계에 보내는 신호이기도 하다. 어깨를 움츠리고 고개를 숙이면 뇌는 자신이 패배했다는 신호를 받고, 그에 따라 생화학이 재구성된다. 9번의 비극은 여기서 시작된다. 그들은 자신의 욕망, 자신의 의견, 자신의 분노를 지속적으로 억누름으로써 자신의 존재의 중요성을 스스로에게서 차단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따르면서 자신의 의견을 잊어버린다. 이것을 '자기 망각(Self-forgetting)'이라고 부른다.


9번의 움츠림이 4번이나 5번과 다른 점은 그들의 후퇴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자신도 쉽게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나마 4번은 자신의 고통을 안다. 그나마 5번은 자신이 고립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9번은 잠들어 있다. 자신이 무언가를 포기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로 말이다.


어깨를 펴는 것은 세상에 자신을 선언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내가 여기 있다. 나도 중요하다. 내 욕망도 존재한다'라고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9번에게는 갈등으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산드라 마이트리가 말하는 9번의 신성한 사고Holy Idea, '신성한 사랑(Holy Love)‘을 통해 우리는 9번이 자신의 존재와 본질을 사랑스럽게 여기고, 감사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이 내재되어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진정한 사랑은 자신을 지워버림으로써 오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존재를 충분히 느낄 때, 비로소 타인에게 진정한 사랑을 줄 수 있다. 자신을 작게 만드는 것이 세상을 향한 친절이 아니다. 자신이 완전히 존재할 때, 비로소 세상에 완전히 기여할 수 있다.


움츠림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움츠림형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움츠림을 단순한 결함이나 극복해야 할 나쁜 습관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이다. 4번의 깊은 감수성은 세상이 놓치는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한다. 5번의 철저한 관찰은 다른 사람들이 간과하는 진실을 발견한다. 9번의 수용적인 존재감은 분열된 세상에 진정한 치유를 가져온다. 움츠림형의 내면세계는 깊고 풍부하다. 리소와 허드슨이 각 유형의 '통합'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것은 자신의 본성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성을 세상과 연결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내면의 부유함이 외부 세계와 만나지 않으면, 그것은 자신을 가두는 황금 감옥이나 마찬가지다. 아무리 황금으로 이루어져 있다한들, 감옥은 감옥이다. 4번의 아름다운 감수성은 세상에 표현되지 않으면 자기 연민이 된다. 5번의 탁월한 통찰은 세상에 적용되지 않으면 고립된 축적(아끼똥) 일뿐이다. 9번의 깊은 사랑은 자신의 존재를 통해 흐르지 않으면 타인에게 녹아드는 소멸에 불과하다. 움츠림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움츠림이 삶의 방식에서 너무 고착화된다면, 움츠림형들의 삶은 점점 더 작아지고 말 것이다.



어깨를 편다는 것의 진짜 의미

피터슨의 첫 번째 법칙으로 돌아오자. 어깨를 펴고 똑바로 서라는 것은 겉모습에만 관련된 법칙이 아니다. 우리는 육체로만 이루어진 존재가 아니라 정신적 존재이기도 하다. 몸을 똑바로 하라는 말에는 정신을 똑바로 하라는 요구가 동시에 들어있다. ‘똑바로 선다‘는 것은 ’존재‘의 부담을 자진해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재앙 앞에서 얼어붙지 않고 적극적으로 도전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삶의 무게를 기꺼이 짊어지겠다는 선언이다.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건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단이다.


4번에게 어깨를 편다는 것은 결핍이 사라진 다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자신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자신의 감정이 세상의 눈에 너무 크고 너무 어둡더라도, 그 감정이 진짜라는 것을 믿고 세상에 내어놓는 것이다. 5번에게 어깨를 편다는 것은 완전히 알지 못해도 참여하는 것이다. 유리벽 뒤에서 나와 자신의 지식을 행동으로, 관계로, 세상에 대한 기여로 전환하는 것이다. 9번에게 어깨를 편다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타인의 의견이 아닌 자신의 목소리로 세상에 내보이는 것이다. 세상과의 만나고, 삶 속에 뛰어들고, 어깨를 펴고 나의 공간을 차지하는 선택하는 용기를 내어보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바닷가재를 통해 자신을 돌보지 않는 존재를 세상이 어떻게 대하는지 알 수 있다. 세상은 그를 더 작은 공간으로 밀어 넣을 것이다. 반면 싸움에서 승리한 바닷가재는 삶에서 피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기꺼이 짊어지면서도 그 속에서 기쁨을 찾을 수 있다. 싸움에서 승리한 바닷가재를 기억하라. 바닷가재는 3억 5000만 년 동안 이어져 온 삶의 지혜를 알고 있다.


어깨를 펴는 것은 공격성이 아닌 책임이다. 자신의 감수성을, 자신의 통찰을, 자신의 사랑을 세상에 가져오겠다는 책임. 피터슨의 첫 번째 법칙의 본질이 바로 여기에 있다. 어깨를 펴고 똑바로 서라. 세상은 너의 최선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네가 움츠러들어 있는 한, 세상은 그것을 받지 못한다. 당신이 안으로 숨겨온 그것, 세상이 너무 거칠고 너무 시끄럽다고 느껴 감추어온 그것, 당신이 세상에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을 주어라. 이제 어깨를 펴라.


참고:

조던 피터슨, 『12가지 인생의 법칙』

산드라 마이트리, 『완전한 에니어그램』

돈 리처드 리소 & 러스 허드슨, 『에니어그램의 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