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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nui Dec 20. 2023

절정 다음엔 추락: 1900년의 부다페스트와 지금 서울

『부다페스트 1900』(글항아리) - 존 루카스

절정 다음엔 추락: 1900년의 부다페스트와 서울의 지금


문카치 미하이와 그의 작품 〈빌라도 앞에 선 예수〉


문카치 미하이(1844~1900)를 아는가? 아마 모를 것이다. 당신이 서양미술사에 어지간히 해박하거나 헝가리에 개인적인 연고가 있는 게 아니라면. 그는 사실주의 화풍의 대가였고 당대 유럽에서 헝가리를 대표하는 명사였으며, 오늘날까지도 헝가리 사람들이 친숙하게 여기는 국민적인 화가다. 하지만 우리는 문카치 대신 세잔과 고흐를 기억한다. 사실주의 화가로는 쿠르베와 밀레를. 예술사의 아이로니컬한 기억술로부터 우리가 도출할 수 있는 사실은 두 가지다. 하나, 미술사에서 19세기 후반은 사실주의자가 아닌 인상파를 위해 때늦게 헌정되었다. 둘, 예술가 사후의 세계적인 유명세는 기량만큼이나 국적과도 유관하다. 이는 다시 하나의 결론으로 수렴한다: 역사는 스스럼없는 망각과 새삼스런 재발견의 교차로다.


존 루카스(1924~2019)의 『부다페스트 1900』은 교차로를 가로지르는 책이다. 그 교차로는 또한 세계주의와 민족주의, 도시엘리트주의와 대중영합주의, 유대인과 비유대인, '부다페스트' 정신과 '진짜 헝가리' 정신이 서로 얽히고설키는 장이기도 하다. 루카스는 이 난장에 추상과 개념이라는 틀을 들이대기보다는 구체적인 삶의 풍경을 재구현하고자 한다. “이 책의 주제는 이 도시의 역사가 아니라 어느 시점에서의 역사적 초상, 분위기, 거기에 살던 사람들, 그들의 성취와 고난을 그리는 것이다.”


저자는 독자들을 세기의 끄트머리로 소환한다. 장소는 물론 부다페스트. 소환 명분은 부고다. 관에 누운 자는 누구인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헝가리의 아들” 문카치 미하이, 그리고 그의 부모이자 고향인 헝가리와 부다페스트다. 성대한 장례식이 치러지고 있는 서글프지만은 않은 도시의 정경을 저자는 운치 있는 어조로 소묘한다. 애수에 젖어 있으면서도 활기가 흐르는 모순의 거리에 발을 들인 독자는 행렬을 빠져나올 즈음에야 서글픈 위화감을 곱씹게 된다. 저자는 1900년을 부다페스트의 역사에서 정점으로 꼽는다. 이제 절정을 지나 내리막길로 접어드는 조락의 기미를 당대인들은 대부분 눈치채지 못했다. “사람들이 유성의 상승을 얘기할 때 사실 유성은 추락하고 있다. 문카치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이 진술은 헝가리와 부다페스트의 운명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저자는 본인조차 겪지 못한 앞선 시대의 도시문화를 추체험하며 떠나온 조국의 때이른 죽음을 예리하게 감지하고 있다. 1900년의 장대한 장례는 진정한 의미의 ‘국장’(國葬)—황태자 부부의 갑작스러운 피살로 인해 닥친 이중제국의 몰락—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부다페스트 1900』은 헝가리계 미국인인 저자가 고향의 영전에 바치는 장송곡이다.






아무래도 한국의 독자들에게 부다페스트는 낯선 도시일 테다. 유럽의 중심에서도 부다페스트는 다소 생소한 곳이었다. 1815년에 오스트리아 수상 메테르니히는 빈을 방문한 어느 외국 고관에게 헝가리 방향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저기서 유럽이 끝난다. 그러니까 헝가리는 그때까지만 해도 유럽의 변두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19세기 중반을 지나며 급전직하한다. 복잡한 유럽의 정세는 헝가리에게 이득이 되었다. 1867년에는 오스트리아로부터 상당한 수준의 자치권을 얻어내며 제국의 한 축으로 승인받는다. 헝가리의 심장인 부다페스트는 어느덧 유럽의 여섯 번째 대도시로 발돋움한다. 19세기 동안 부다페스트의 인구는 10배 가까이 늘어 50만 명에 달했다. 금융이 융성해지고 교육열은 뜨거워진다. 사람들은 거리마다 들어선 카페문화를 폭넓게 향유한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부다페스트는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오래된 유럽의 마지막 대도시가 되었다. 그리고 그대로 쪼그라들었다.






저자가 제시하는 몰락의 상세한 원인을 구태여 되씹진 않겠다. 다만 내가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불안한 징조는 언급해야만 한다. 나는 헝가리의 몰락을 반추하는 내내 대한민국의 암울한 앞날을 그려볼 수밖에 없었다. 책에서 언급되는 헝가리의 많은 특징이 한국과 겹쳐 보였던 것이다. 저자가 헝가리 정치를 서술하는 대목을 보면, “헝가리어는 신비주의적이라기보다는 합리주의적이며, 은유적이기보다는 서정적”이고, “민족성에 음흉하거나 비밀스러운 면이 거의 없다.” 그러나 이성적 대화는 자주 수사학적 말장난에 도취되곤 해서 “대화에서 이익을 얻는 경향이 거의 없으며, 타협에서 만족을 찾는 경향도 거의 없다.” 헝가리인들은 추상성을 좋아하지 않았고, 독일 낭만주의적인 ‘깊이’ 관념에도 달리 관심이 없었다. “그 어조는 종종 우울했지만, 말씨와 소리와 색채와 맛과 촉감의 물질적 즐거움을 포함한 삶의 욕구는 풍부했다. 헝가리인은 신경증보다는 정신병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상술한 헝가리인들의 국민성은 한국인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 밖에도 놀라우리만치 많은 부분들이 겹친다: 통제되어 낮은 범죄율, 널리 퍼진 성적 방종, 이와는 반대로 여전히 보수적인 성 관념, 급성장과 상당수의 인구가 아파트에서 세 들어 사는 주거 형태, 상업을 경시하는 전통을 빠르게 대체하게 된 부르주아, 계급의식에 민감한 사회, 강한 인정욕구, 저출산과 높은 교육열, 낮은 문맹률, 계층 상승에 대한 열망, 자녀의 늦은 독립 등등…


단언컨대, 20세기 말~금세기 초의 서울과 19세기 말의 부다페스트는 동류의 도시다. 두 도시 모두 급속한 성장을 겪은 주변부의 거대한 중심부였고, 세계성과 지역성을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려운 혼종적 성격을 지닌 대도시였다. 문화적으로 화려한 중흥기를 맞이했지만, 도시의 다른 편에서는 퇴폐가 성행하고 양극화가 심화됐다. 소돔과 바빌론. 그리고 서울과 부다페스트. 토크빌은 귀족의 악덕은 자만심이고 민주주의의 악덕은 질투심이라고 말했는데, 저자는 그 두 가지 악덕이 마구 뒤섞여 있는 ‘과도기의 악덕’이 당대 헝가리에 팽배했다고 지적한다. 이 진술은 지금의 한국과 서울에도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가? 『부다페스트 1900』은 『서울 2000』으로 되풀이될 수도 있다.


우리는 아주 높은 곳에서 떨어질 것이다. 아주 빠른 속도로. 자이로드롭처럼.





조선일보 그래픽자료


최근 뉴스를 보니 한국어를 배우려는 외국인들이 어느 때보다 많아졌다더라. 듀오링고라는 언어 학습 어플의 자료에 의하면 한국어는 전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인기 있는 언어가 되었다. 아시아의 동쪽 끄트머리에 매달린 자그마한 이 반도국의 ‘국격’이 지금만큼 드높았던 때가 없다. 그러나 고도가 높을수록 추락은 가파른 법이다.


어쨌든 한국은 헝가리가 아니고 부다페스트는 서울이 아니다. 각자에겐 각자의 문제가 있는 법이고, 비슷해 보인들 동일한 문제는 없다. 그렇담 해결책은? 그런 걸 누가 알겠는가. 『부다페스트 1900』으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건 추락을 멈추는 비상브레이크의 작동법이 아니라 무감각을 깨우고 추락을 인식하는 눈썰미다. 존 루카스는 헝가리 정신의 본질엔 비관주의가 자리 잡고 있는데, 육체적 욕구를 포함하는 무분별한 낙관주의가 이를 자주 감춰버렸다고 지적한다. “낙관주의는 여러 차원에서 국가의 역동적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근시안적이며 순진무구한 측면도 많았다.” 내가 읽기엔 이 부분도 오늘날 한국인들의 본성을 설명하기에 매우 적확한 서술이다.


우리는 추락을 예고하거나 증언하는 비관의 목소리에 더 귀기울여야 한다. 물론 이는 진 빠지는 일이다. 묵시록적인 호들갑을 떨거나 자기혐오로 흐르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그저 아주 많은 것들이 이미 잘못되어버렸고 계속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지하자는 얘기다. 존 루카스가 20세기 헝가리의 가장 위대한 산문가로 일컫는 크루디 줄러(1878∼1933)가 그리했듯이. 줄러는 개국 천년 기념 행사로 온 도시가 떠들썩했던 1896년에 이미 도시의 타락을 짚어냈다.


"이제 페스트는 겸손의 가면을 벗어던졌다. 이 도시는 해가 지날수록 더 많은 장신구를 착용하고 있었다. 겸손했던 자는 목소리가 더 커졌고, 검소했던 자는 도박꾼이 되었으며, 엄격한 수녀원에서 자란 처녀는 풍만한 가슴을 뽐내기 시작했다. (...) 페스트는 불결해졌다."


그리고 도시가 이미 몰락한 뒤인 1차 대전 시기에는, 다소간의 향수와 애정을 담아, 다음과 같이 썼다.


“어쨌든 페스트는 그렇게 기분 좋은 도시가 아니다. 그러나 호감 가는 곳이다. 그렇다. 다혈질의 선정적인 젊은 유부녀, 추파를 던지는 그녀의 눈빛을 모든 사람이 알고 있고 신사들은 기꺼이 몸을 굽혀 그녀의 손에 키스하는, 그 유부녀처럼 호감이 가는 곳. 우리 같은 시골 사람이 아무리 짜증을 내더라도, 오래되고 축복받은 마자르족이 꿈꿔왔던 헝가리 문화가 그 특질을 부여받은 곳은 부다페스트다.”


한국의 문화가 그 특질을 부여받은 곳은 서울이다. 매력적인 젊은 유부녀 같은 이 도시와 우리는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서울의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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