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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연 May 06. 2018

내 눈에만 보이는 게 제일 예뻐

내가 사랑한 바르셀로나 대성당


  사람들은 저마다 경험이 다르고, 관심에 따른 시선 차이가 있다. 말하자면 세상을 바라볼 때 일종의 색안경을 끼게 되는 것이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고, 오히려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럽다는 거다. 먼지 한 톨 없이 투명한 안경을 낀 채 바라보는 세상은 정직하고 객관적일 수 있지만, 그만큼 재미없고 냉정하다. 내게는 차라리 몇 겹의 필터를 두른 평범한 색안경들이 정겹고 다정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정작 자신의 안경이 어떤 색인지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나를 제3자의 시선에서 바라보기가 그렇게나 어렵다. 내가 낀 안경은 어떤 색일까? 이렇게 말하는 나도 내 안경의 색은 잘 몰랐지만, 이번 여행에서 어설프게나마 조금 알게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왠지 낯설지 않은 바르셀로나

  남유럽 여행의 시작점인 바르셀로나의 첫 인상은 외국 같지 않다는 거였다. 나 혼자만의 생각인가 했는데, 같이 간 내 친구도 똑같이 느낀 걸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 하다. 거리에 오가는 사람들의 생김새가 다를 뿐 잘 정리된 서울의 시가지 같은 인상이었다.

분명히 바르셀로나인데 왜 서울역 같지...? 광화문에서 본 것 같은 느낌도 들고...

  그게 실망으로 다가오기보다는 여행의 첫 출발에서 묘한 안도감을 주는 부분이었다. 아무도 아는 사람 없는 파티에 갔는데 우연히 친한 친구를 만난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소매치기와 인종차별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듣고 와서 잔뜩 쫄아 있었는데 겁먹을 필요 없다고 말해주는 도시 풍경이었다. 그래. 여기도 다 사람 사는 곳이겠지.



 예쁘지만 내게 매력적이진 않았던 가우디의 곡선


  바르셀로나를 방문하면서 제일 기대했던 건 가우디의 작품들이었다. 구엘공원과 카사 밀라, 카사 바트요 등등 천재 건축가의 사랑받은 건축물들이 실물로 보았을 땐 어떤 느낌일지 기대가 컸다. 그런데 너무 많이 기대했던 건지, 내 취향이 아니었던 건지, 실제로 봤을 때 가우디의 작품들은 내게 큰 감동을 남기지 못했다.

그래도 사진은 찍었다. 난 인증샷을 좋아하니까...


  아침 8시 전에 가면 구엘 공원에 공짜로 입장할 수 있다길래 아침을 먹는둥 마는둥 하고 호텔을 나섰다. 가까스로 무료 입장에 성공한 우리의 한 줄 감상평은 공원이 생각보다 작다는 것이었다. 구불거리는 기둥들이나 그 유명한 도마뱀 조각은 예쁘고 독특했지만, 솔직히 건축학에 대해 딱히 아는 게 없는 내 입장에서는 특별한 감흥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이걸 그림으로 남기고 싶은 마음이 별로 들지 않았다.

  이러한 감상은 카사 밀라와 카사 바트요를 구경하면서까지 이어졌는데, 특히 돈 없는 가난한 학생 여행자의 입장에서는 비싼 입장료가 꽤 아까웠다. 친구와 나는 고민 끝에 바깥에서 두 건축물을 구경하고, 카사 바트요만 입장권을 끊었다. 그리고 우리는 결정을 후회하지 않았다. 카사 바트요는 독특한 조형이 많고 아름다웠지만, 문을 나서면서 가우디 시리즈를 더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샘솟진 않았다. 어디가서 미술 좋아한다고 말하기 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여행 책자엔 없는, 하지만 그래서 꼭 그리고 싶은 곳


  그림을 그리는 사람만이 얻게 되는 여행의 특별한 즐거움은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고 넘어가는 것들에서 매력을 발견한다는 점일 것이다. 나는 그리고 싶은 것들에서 눈을 떼지 못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바르셀로나 대성당은 내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바르셀로나 대성당은 머릿속에서 그려왔던 평범한 유럽의 성당이었다. 어릴 때 수박 겉핥기식 패키지 유럽여행을 한 적이 있었던 내게는 정말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다. 하지만 구경할 시간이 넉넉하게 주어진 건 처음이었고, 세세하게 관찰한 것도 처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술사 수업을 들은 후 처음으로 직접 만난 유럽 성당이었다.

거대한 오르골과 은은한 조명, 고딕 건축의 볼트... 그리고 종루까지 올라가는 루프탑까지!


포즈를 취해주는 갈매기. 눈빛은 '뭘 봐'라고 말하고 있었다.

  바르셀로나 대성당을 넋을 놓고 구경하면서 잊고 있던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아, 그러고보니 나는 곡선보다는 쭉쭉 뻗은 직선을 좋아했었지... 미술사 수업을 들으면서도 제일 좋아했던 중세 유럽 건축 양식은 고딕이었다. 하늘까지 닿도록 솟아오른 첨탑과 무거운 건물의 하중을 받치는 아치, 양 옆 복도를 따라 천장에 길게 늘어선 볼트 구조는 언제나 내 눈길을 끌었다. 여기에 바르셀로나 대성당만의 매력이 있었는데, 바로 루프탑이었다. 성당 안에 설치된 엘레베이터를 통해 성당 꼭대기에 올라갈 수 있었고, 간이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천장 위를 걸어볼 수도 있었다. 순식간에 탁 트인 바르셀로나 시내가 눈 앞에 닥칠 때는 가슴까지 뻥뚫리는 기분이었다. 해안 도시 답게 갈매기가 많았는데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아서 갈매기와 함께 사진을 찍을 수도 있었다. 동물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너무너무 반가운 일이었다. 바르셀로나 대성당은 한 마디로 내가 좋아하는 요소들 투성이었다.

  

작은 정원의 주인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 마음을 사로잡은 건 바르셀로나 대성당을 떠나는 길에 만났던 작은 정원이었다. 실컷 구경하고 나가는 길은 성당의 후문 쪽이었는데, 회랑을 따라가다 보니 굉장히 의외의 공간이 있었다. 성당 바로 옆의 작은 정원이었다. 작은 인공 연못과 분수도 갖추고 있었는데, 하얀 거위들이 자리를 점령하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는 백조로 착각했을 정도로 새하얗고 예뻤다. 성당에서 기르고 있는 거위들인 것 같았다.

  그리고 보는 순간 내 가슴을 흔들었던 장면은, 길게 늘어선 복도의 아치 사이로 보이는 풍경이었다. 돌로 만들어진 높은 아치가 어두운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그와 대비되어 환하게 빛나는 하늘과 야자수... 그리고 야자수 사이로 힐끗 보이는, 높은 벽 너머의 바르셀로나 대성당이 내 시선을 끌었다. 직선으로 쭉 뻗은 야자수와 살짝 휘어진 아치의 곡선, 네모반듯하진 않지만 나름의 규칙에 따라 쌓인 오래된 벽돌 벽의 조화는 정말정말정말 그리고 싶은 장면이었다. 홀린 듯이 셔터를 누르고 결심했다. 이건 그려야겠다.

벽 너머로 보이는 바르셀로나 대성당의 첨탑, 그리고 성당을 슬그머니 가리는 야자수

  호텔에 돌아오자마자 사진을 보고 완성한 그림이었다. 제 눈에 안경이라고, 다른 사람에겐 별것 아닐 수 있는 풍경일텐데 왜 그렇게 맘을 끌었는지 모르겠다. (솔직히 지금도 열심히 설명하려고 애써보긴 했는데, 내가 그 순간 느낀 매력을 다른 사람에게 설득하긴 쉽지 않은 것 같다.) 게다가 여행 책자에선 한 번도 보지 못한 풍경이었다는 점에서 더더욱 애착이 갔다. 나만이 발견한, 내 눈에만 예뻐보였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 특별하고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것 같다. 그리고 그건 그림으로 그리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어졌다. 내 눈에만 예뻐보였던 그 느낌을 간직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직접 나만의 여행 책자를 만들어보는 기분도 들고, 유명하지 않은 나만의 핫플레이스 겸 아지트를 표시한 기분도 들었다.



내가 쓴 안경의 색을 발견한 시간


  자신이 세상을 보는 눈을 아는 건 어렵지만 정말 중요하다. 색안경을 끼고 사는 건 당연한 일이라지만, 내 안경이라는 핑계로 자신의 편견을 강요해서는 안 되니까. 내 안경의 색을 알아야 혹시 내가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지지는 않았는지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아는 것도 더 행복한 인생에 큰 도움이 된다.

  이번 여행을 통해 내가 알게 된 건 '무엇을 좋아하는지'에 가까운 것 같다.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한 가지 필터로만 이루어지지는 않았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림 그리고 싶은 것들에 콩깍지를 쓰고 바라보는 것 같다. 나는 예쁜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그게 내 눈에만 보인다고 생각했을 때 더 특별하고 예뻐보이는 것 같다. 바르셀로나 대성당의 작은 정원이 그랬듯이 말이다.


  구엘공원과 바르셀로나 대성당은 남들이 다 좋다고 말하는 게 나한테는 별로일 수 있고, 동시에 남들은 큰 감흥없이 지나가는 것들이 내게는 굉장한 의미로 다가올 수 있다는 뻔한 사실을 알려준 곳이었다. 흔히 하는 말로 여행은 사람의 시야를 넓혀준다고 하는데, 그게 그냥 하는 말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색다른 장소를 구경할 때, 정작 깊게 바라보게 되는 것은 나 자신의 마음 속 생각들인 것 같다. 그래서 제대로 된 여행은 좀 머리가 굵은 다음에 다녀와야 되는 건가 싶기도 하고... 어쨌든 다음에 다시 바르셀로나에 갈 기회가 생긴다면 나는 분명히 바르셀로나 대성당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내 아지트가 잘 있는지, 그 자리가 이번에 또 달라보이지는 않는지 확인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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