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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연 Dec 12. 2020

사무관이 되기까지 아직도 1년반

막내도 아니고 팀장도 아닌 수습사무관: Lv.3 교육생부터 시보까지

  올해 연수원 생활은 코로나 탓에 이래저래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들었다. 동기들과의 합숙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중앙부처로의 차출도 있어서 흔히 생각하는 연수와는 제법 거리가 있는 생활을 했다고... 사실 연수원 생활은 이런 시기를 타는 경향이 크다. 평창올림픽 개최 당시 지방연수를 가는 대신 올림픽 지원으로 전원 차출된 사건은 유명하고, 세월호 사고 등 큰 사건이 터지는 해는 해외정책연수가 곧잘 취소되곤 했었다. 연수원도 천안에 위치했다가 진천으로 내려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올해부터는 해외정책연수도 완전히 폐지됐다. 하다못해 부처별 선발 TO도 매년 천차만별이고, 연수원에서 받는 점수의 중요도도 크게 달라진다. 기수별로 연수원 생활이 전혀 다르게 기억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하지만 행시 출신들이 연수원 생활을 추억할 때면, 대부분 그래도 그때가 공직생활 중 가장 순수하고 행복했었다고 말한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 때만큼 동기들과 친해질 기회가 없고, 주어진 업무 없이 배우기만 해도 되는 시기가 드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 역시 지금까지도 종종 연수원에서 동기들과 웃고 떠들던 날들이 그리워지곤 한다.


사무관이 되기 위해 떠나는 여정의 시작

  연수를 받을 때 우리의 신분은 상당히 애매한 상태였는데, 시험에 붙긴 했지만 정식 사무관은 아닌, 관리자 교육을 받고 있는 교육생이었다. 예전에는 이 때부터 사무관 ‘시보’라고 해서 수습사무관 내지는 인턴 대우를 해주었지만 언젠가부터 시보 자격도 주지 않고 그냥 교육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연수중 인사혁신처장이 강의하러 왔는데 당시 신규 사무관들이 교육받는 태도가 상당히 불량해서 격노하신 나머지 교육을 제대로 이수하지 않으면 사무관 자격을 박탈해버리겠다고 선포하셨다는 카더라가 있다... 이유가 어떻든지 간에, 이후 행정고시 합격자들은 연수원에서 몇 달 간의 교육을 이수한 후에야 시보 자격을 부여받게 되었다.


  연수원 교육은 신임 관리자 교육과정이라고 불렸는데, 그 거창한 이름처럼 교육 기간도 상당히 길었다. 연수 기간은 좁게는 연수원 교육만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넓게는 연수원 교육을 이수하고 사무관 시보로써 지방연수를 받는 기간까지, 즉 부처 발령 이전 시기까지를 통칭한다. 매 기수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긴 하지만, 연수원에서는 이런저런 강의를 들으면서 교육을 받고 시험을 치며, 중간에 큰 조별과제로 정책기획보고서와 해외정책연수보고서가 주어진다. 수개월의 연수원 교육을 수료하면 사무관 시보 자격이 주어지고, 일반적으로는 지방연수기간을 갖게 된다. 교육생끼리는 대충 지방연수라고 부르긴 하지만, 국가직으로 시험에 합격한 교육생들에게나 지방연수다. 국가직은 전국 지역으로 흩어져 지자체에서 근무하고, 지방직은 중앙부처에서 근무를 하게 된다. 이 때부터 소속 기관에서 근무하는 소수 직렬도 있다. 어쨌든 지방연수 다음에야 각자 원하는 부처에 지원하고 면접을 거쳐 최종 부처에 소속되게 되었으니, 연수원 입교 이후로도 1년은 지나야 소속 부처에서 정식으로 근무할 수 있는 셈이다. 시보를 떼는 것까지 친다면 여기에다가 몇 개월은 더 합해야 된다. 나는 임용유예까지 했기 때문에 시험에 합격하고도 거의 3년 뒤에야 시보를 떼고 사무관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처음부터 공직의 허리로 들어오는 인원이다 보니 준비 기간을 오래 거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연수원과 그놈의 조별과제

  천안 중앙공무원교육원 시절 연수원 교육은 비합숙 기간과 합숙 기간이 섞여 있었고, 진천 인재교육개발원이 완공된 이후로는 전원 합숙 교육 일정으로 변경되었다. 개인적으로 느낀 연수원 생활의 가장 큰 매력은 합숙에 있었다. 대규모 장기 엠티에 온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힘든 수험기간을 이겨내고 한껏 들뜬 사람들끼리 처음 만나서 인사를 나누던 그 장면은 마치 대학교 신입생 환영회를 연상하게 했다. 신입생치고 나이는 좀 먹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이 시기 교육생들은 모두 신이 나 있고 무슨 짓을 해서든 놀고 싶어 한다. 하루 일과가 끝나면 동기들끼리 술 한잔 하러 가기도 하고, 기숙사 방에 모여서 새벽까지 떠들기도 했다. 매 기수마다 소모임이 이것저것 생기는데 흔히 생각하는 농구, 탁구, 등산, 보드게임, 독서, 영화, 와인 등 다양한 취미에 맞춘 소모임이지만 친목을 빙자한 술모임으로 변질되곤 했다. 물론 통금도 있었고 기숙사 규칙도 있었지만, 수능 끝난 고3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신난 교육생들을 통제하기는 정말 쉽지 않았다.


  매일 놀기만 한 건 아니었고, 연수 기간 중 시험도 있고 과제도 있어서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날도 종종 있다. 지방직이나 부처가 정해진 일부 소수직렬은 연수원 점수가 무의미하기 때문에 퇴교(!)만 피한다는 정신으로 교육에 임하지만, 재경, 일행 등 인원이 제법 많은 직렬은 연수원 점수에 따라 최종 부처가 갈라지기 때문에 밤을 새워 보고서를 쓰는 경우도 있었다.

  교육생들이 '보고서'하면 떠올리는 건 대규모 조별과제일 것이다. 연수원 생활은 본질적으로 단체생활이었고, 조직에 융화하고 적응하는 방법을 기르는 시간이었다. 그래서인지 이런 종류의 조별과제가 꽤 많았다. 연수원에서 가장 시간이 오래 걸리고 점수로써도 중요한 보고서는 2가지였다. 정책기획보고서와 해외연수보고서. 문제는 이 보고서를 랜덤으로 짜여진 팀원들과 함께 작성해야 된다는 것이다. 강의를 듣고 치는 시험은 본인이 하는 만큼 점수가 나오니 노력에 비례하지만, 보고서는 꼭 그런 것이 아니라서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도 많았다. 연수원 점수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제법 되어서 재경, 일행 직렬은 이 조별과제에 공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보고서 팀원을 짤 때 직렬을 섞기도 하고, 연수원 점수가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2차점수 최상위권이나 부처 선택에 연연하지 않는 경우)도 상당히 많이 있어서 모든 팀원들의 이해관계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조별과제의 악몽은 이 똑똑한 사람들을 모아놓은 연수원에서도 매해 꼭 재현되곤 한다.

  정책기획보고서는 주어진 주제에 대해 정책을 기획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기획, 예산, 법률 보고서를 하나씩 작성하는 과제였고, 해외연수보고서는 특정 국가와 관련된 주제를 선정하고 이에 맞추어 해외 연수일정을 직접 계획해서 보고서를 작성하는 과제였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해외연수는 많은 교육생들이 기대하는 일정 중 하나였다. 제비뽑기를 통해 국가를 선택할 순서를 정했는데, 우리 팀은 상당히 높은 순번을 뽑아서 신나게 해외연수팀장의 이름을 연호했던 기억이 난다. 점수는 그냥 그랬던 것 같은데 팀원들끼리 사이가 좋아서 모두 즐거운 기억으로 남았다. 지금도 그 때 팀원이었던 동기들과 만나면 보고서 쓰면서 고생했던 일들을 얘기하면서 킬킬거리곤 한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어떤 교육들보다 오래 기억에 남은 건 다 동기들과 함께했던 순간들이었다.


지방연수, 그리고 부처 지원

  수개월 간의 연수원 교육을 마치면 시보가 되어 지방연수를 떠나게 된다. 국가직의 지방연수는 중앙정부에서 일하게 될 수습사무관들이 지자체 일선의 사정을 파악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한다. 나도 지자체로 연수를 가게 되어 특정 과, 팀에 배치되어 근무하게 되었다. 그런데 막상 근무하게 되면 위치가 그만큼 난처할 수가 없다. 직급은 팀장과 같은데 실무적으로 아는 건 하나도 없는 바보다. 물론 가르치면 잘할거라는 기대가 있긴 한데, 문제는 몇개월 있으면 또 가버린다. 가르쳐서 써먹기에는 좀 애매한 거다. 그래도 5급이라고, 바보도 쉽게 할 수 있는 잡일을 주는 건 팀장님이나 팀원분들이 부담스러워하시는 것 같았다. 눈치껏 엑셀작업, 복사나 문서 파쇄처럼 팀에 쌓여있는 잡일을 처리하곤 했는데 모두가 나를 불편해 하는 것이 느껴져서 한동안은 가시방석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차라리 신입처럼 대우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서 '막내처럼 편하게 대해주시라'고 부탁드리고 잡일도 열심히 했는데 잘 되지는 않았다. 나중에 선배들에게 물어보니, 직원들 입장에서는 자기 팀장으로 올 수도 있는 사람을 편하게 대하기는 결코 쉽지 않았을 거라고... 아니 그래도 국가직이 지자체 팀장으로 갈 일은 웬만하면 없지 않나... 아무튼 지자체에서도 이런 실정을 잘 알고 있어서 눈칫밥을 먹지 않게끔 출장을 보내거나 단기로 팀을 꾸리는 프로젝트성 업무를 주곤 했다. 다행히(?) 이 기간에도 과제가 있어서 일이 없을 때면 과제연구를 했었다. 일종의 OJT기간으로, 과분한 대우를 받는 인턴처럼 근무했던 시기였다.


  뭐니뭐니 해도 이 시기 가장 많은 관심을 받는 것은 부처 지원이다. 사무관은 하나의 직급일 뿐이고, 부처에 따라 사무관들의 삶은 굉장히 달라지게 된다. 각 부처는 사실상 정부라는 모기업에 속한 다양한 계열사들이라고 보면 된다. 부처별로 같은 건 월급 뿐이고, 하는 일의 성격, 책임이나 권한, 전문성, 워라밸까지 많은 것이 다르기 때문에 사실상 다른 회사라고 봐도 된다. 물론 한 번 부처를 정한다고 모두가 평생 그곳에서 근무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대부분의 사무관들의 향후 20년은 결정짓게 되어서 부처 지원은 매우 중요한 선택이다. 지방연수 끝무렵에 부처별 지원 TO가 나오고, 각 개인은 3지망까지 부처를 지원하게 된다. 이때즈음 동기들간 눈치싸움이 굉장히 치열해지는데, 다들 자신의 등수와 본인보다 높은 점수의 동기가 어디에 지원하는지 알고 싶어한다. 보통 이 시기 누군가가 총대를 매고 직렬별로 점수를 모아 공유하기 때문에 자신의 등수는 대충 알고 있는 상태에서 부처를 지원하게 된다. 지원한 부처에 따라 자기소개서를 받거나 면접을 보는 경우도 있다. 3지망까지 쓴 부처에서 모두 탈락하는 경우 잔여자가 되어서 TO가 남는 부처에 들어가게 된다.


행정사무관에 임함

  수습사무관은 시보 임명후 1년 뒤에야 정식 사무관이 된다. 부처에 소속되어서도 몇개월 뒤에 임명장을 받게 되는데 이 때가 되어서야 정식 공무원이 되었다 싶은 느낌이 난다. 사무관부터는 붓으로 직접 쓰고 대통령의 인장과 대한민국 도장이 크게 찍힌 임명장을 받게 된다. 내용은 간단했다. "행정사무관에 임함. XXX 근무를 명함." 내가 이 몇 글자 적힌 종이 한장 받으려고 몇년을 기다렸구나 싶어서 뭔가 이상한 기분도 든다. 임명장을 받아온 날, 나보다도 부모님이 너무너무 좋아하셨던 기억이 난다. 괜히 쑥쓰러워져서 구석에다 치워놨는데, 얼마 뒤에 거실 한복판에 걸려 있는 걸 발견하고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었다. 나는 그렇게 시험에 합격한지 3년여 만에 비로소 사무관이 됐다.

  몇몇 동기들은 임명장을 액자에다가 곱게 보관하기도 했는데, 나도 그럴걸 그랬다. 밖에 그냥 방치했더니 종이가 습기를 머금어서 우글우글해지는 바람에 폼이 영 나지 않는다. 지금은 찬밥 신세로 책꽂이 귀퉁이에 꽂혀있지만, 어느날 문득문득 생각나서 펼쳐볼 때가 있다. 한글자 한글자 정성스레 적힌 글자를 손으로 쓰다듬으면 진로고민을 하던 때부터 수험생 시절, 임용유예 때 놀던 기억, 연수원 교육과 어리버리한 시보 생활 떠올라 초심을 다잡게 된다.


글을 마치며

  좋은 사무관이란 무엇일까? 항상 어떤 공무원이 되어야 할지 생각하는 편인데 좀처럼 뚜렷한 방향성은 잡지 못해서 고민이다. "공무원은 돈을 쓰는 직업이다." 예전에 신문사설에서 우연히 읽은 글인데, 나는 아직까지 이것만큼 공무원을 다른 직업과 뚜렷하게 구분짓는 표현을 보지 못했다. 모든 직업은 근본적으로 부가가치를 창출해서 돈을 '버는' 직업이지만, 공무원은 유일하게 적재적소에 돈을 잘 쓰는 걸 목표로 하는 직업이다. 제대로 쓰지 못하면 국고를 낭비하는 세금도둑이 되고, 잘 쓰면 국가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공(公)직자가 된다. 그 중에서도 사무관은 중간관리자이자 실무자인 5급으로 기획을 보통 담당하게 된다. 돈을 어떻게 잘 쓸지에 대한 세부 계획을 세우는 역할인 셈이다. 전반적인 방향은 상사의 지시를 따르면서도, 일선의 실상을 잘 파악해서 기획해야 되는지라 이래저래 치이는 입장이기도 하다. 동시에 이 많은 보고서가 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고 푸념하는 평범한 직장인이기도 하다. 좋은 사무관에 붙일 수 있는 추상적인 말들은 너무 많지만, 정작 좋은 사무관이 되기 위해 내가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진짜 좋은 사무관이 되려면 능수능란하게 수행해야 하는 역할이 너무 많다.

  길게 고민을 하다보면 가장 근본적인 고민, 가장 처음에 했던 생각들로 돌아가게 된다. 나는 왜 사무관이 되었던가, 시험을 준비하는 나는 무슨 생각을 갖고 있었나, 유예생 시절 그리고 교육생 시절 나는 어떠했던가... 이제와서 말하지만 이 작은 시리즈 글은 사실 그래서 쓰기 시작했다. 더 잊어버리기 전에 가장 초년의 나를 기록하고, 솔직한 초심을 적어두고 싶었다. 국가에 이바지하겠다는 어떤 거창한 이상을 가지지 않았지만 적어도 공적인 일에 종사하고 싶었던 그 마음, 힘든 수험생활을 견뎌냈던 이유, 한없이 즐겁고 순진했던 유예생 시절 가졌던 생각, 동기들과 울고 웃으며 더 나은 미래를 꿈꿨던 순간에 대해 기억하고 싶었다.

  요즘은 때때로 5년 뒤, 10년 뒤의 나를 그려보게 된다. 그때는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지금의 나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혹시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을까? 공무원이 되면 향후 수십년간은 큰 변동없이 평탄한 삶을 살게 될 줄 알았는데, 고민은 어째 더 깊어진 것 같다. 그래도 고민하는 공무원이 그렇지 않은 공무원보다 훌륭한 공무원이 될 것이라는 작은 믿음을 가지고 있어서 기분이 나쁘진 않다. 먼 미래의 내가 고민 끝에 길을 잃게 된다면, 내가 썼던 이 글들을 읽어보면서 초심을 찾아 되돌아올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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