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유독 권위자에게 두려움을 느낀다. 나이와는 상관없이 내가 고개를 숙여야 하는 누군가에게 말이다. 치욕감과 버무려진 불안의 합성물이다. 나를 질책하거나 혼내지 않을까 하는 불안정감의 주물에 녹아져 끊임없이 찍혀 나온다.
권위자들은 줄곧 나에게 힘을 행사했다. 자신의 말에 힘을 실으려고, 순전히 그 힘을 증명하고 확인하려고 벌게지는 얼굴과 떨리는 목소리를 불러내었다. 작아지는 '나' 앞에서 영원히 커질 것만 같은 '그대'는, 아니 영원히 커지려는 그대는 나와는 다른 사람이고 싶어 한다.
하지만 또한 나는, 수도 없이 많은, 자애로운 권위자들을 만났다. 진정으로 나를 아껴주고 그리워해 주며 때로는 나를 높여주기도 하는 그런 사람들 말이다. 권위를 진정으로 다룰 줄 알았던 그들은 자신의 위치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누구보다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 적절하게 남을 돌볼 줄도 알았을 테다.
애석하게도, 그런 앎이 인성을 만들어내진 못한다. 자신의 위치가 무엇을 만들어내고, 무엇을 일으킬 수 있으며 누군가의 삶을 어느 정도까지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잘 안다고 해서 좋은 권위자가 되진 못한다. 때로는 무책임하게, 때로는 자신을 속이면서까지 거짓되게 젠체하는 그런 이들도 있다.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을 꼰대라고 불러왔다. 그러나 나는 무언가 부족함을 느낀다. 그들이 과연 그렇게 불리는 게 마땅한가. 나는 따라서 조어를 하기로 했다. 이름하여 '꼬니자'. 꼰대의 꼰을 비꼰다는 의미로 따와서 권위자 앞에 붙여 넣는 것이다. 그래서 꼰위자, 발음대로 꼬뉘자, 쉽게 말해 꼬니자.
꼬니자들은 권위를 가지지 못한다. '꼬니'만을 가질 뿐이다. 여기서 꼬니란 단순히 일그러진 영웅의 권위를 말하지 않는다. 이는 무언가를 '꿔내'는 것이다. 상대방이 가진 오롯한 삶의 권위를 빌려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상대가 자신의 삶을 꾸어줄 마음이 없다면 여지없이 꼬니는 도산하고 말 것이다.
꼬니는 빌려온 것이므로, 영원히 마르지 않을 샘물이 아니므로 언젠가는 바닥을 긁게 될 것이다. 그러니 오늘부터 나는 그들을 꼬니자로 부를 것이다. 상대 삶의 존엄을 빼앗아 꾸어먹는 자들을 향해 마음껏 비웃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