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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than Feb 03. 2024

5,000일 넘게 숙성된 결혼 이야기

7번의 헤어짐, 1번의 결혼

고등학생 시절,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 야외 예배를 드리러 아는 분의 포도밭에 간 적이 있었다.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승합차 안에서 왠 유쾌 발랄한 한 친구가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었다. 자기는 만화 주제가를  다 알고 있다고 했었나? 유난히 튀던 그 친구(현 아내)가 기억에 남았다. 우연히 가까운 거리에서 살고 있었고, 이후로 자주 만나게 되면서 친해지게 되었다.



당시 나는 고3 이었고, 아내는 고2였다. 한 살 차이이기도 했고, 개그 코드도 잘 맞아서 자주 놀러 다녔다. 그러면서 나는 일명 짝사랑, 혼자서 좋아하게 되어버렸다. 아내는 파워 E 의 성향을 가진 사람이었다. 특유의 친화력으로 사람들을 편안하게 대할 수 있는 재능이 있었고, 그 결과 수 많은 여/남사친을 거느린 사람이었다. 반대로 나는 그냥 조용한 쭈구리였다. 그래서 그런지, 그냥 마음을 숨기며 좋은 동생으로 남기려고 했던 것 같다.


한 해가 지나고, 나는 대학을 가게 되었다. 그리고 아내는 입시를 준비할 고3이 되었다. 교회에서도 서로 부서가 나눠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서로 예배 마치는 시간에 맞춰 집에 갔다. 쉬는 날이면 여러 친구들과 여기 저기 같이 놀러다니곤 했었다. 아내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점점 고백을 해야할 용기를 내야하는 시점이 다가 오고 있었다.


용기를 내야해.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 친한 오빠, 동생이었던 상황이었고 주변 지인들에게도 굉장히 머쓱했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정말 많이 주저했고, 혹 지인들이 너희 사귀는거 아니야? 라고 물을 때면 실소를 하며 절대 아니라고 손을 내저었다.


절대 마음이 없다는 둘을 사진으로 이어 붙인 친구


누가봐도 서로 좋아하는 것 같은데... 지인들의 의심 아닌 의심이 생기기 시작할 즈음, 나는 고백하기로 결심을 한다. 그리고 가장 친한 친구에게 '그 친구를 좋아하고, 고백을 하려고 한다.' 라고 이야기를 했다. 지난 1년 동안 한 번도 그런 이야길 하지 않던 친구가, 이제서야 진심을 이야기 하다니. 내 친구는 서운함 반, 반가움 반으로 그 소식을 맞이해주었고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아내의 생일인 7월, 친구들과 함께 집 앞으로 찾아가서 깜짝 서프라이즈를 해주기로 했다. 열댓 명이 모여서 케잌과 초, 생일 선물을 들고 집 앞으로 찾아갔다. 그리고 연락을 받은 아내가 나왔을 때 쨘 하고 축하를 해줬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나온 아내의 모습


그 가운데에 나는 없었다. 나는 따로 빠져서 집으로 돌아가는 아내에게 서프라이즈를 해주기 위해 준비 중이었다. 내심 축하하는 사람들 사이에 내가 없어 서운했는지 나는 어디 갔냐고 물었다고 한다. (나는 네 뒤에 있다고)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던 아내 앞에 슬쩍 나타났다. 엄청 놀라는 아내. 대학 입학 후 첫 과외로 벌었던 돈으로 산 선물과 함께 지난 1년 간의 나의 마음을 용기내어 고백했다. 그리고 그 고백은 대성공이었다.




가장 가깝던 친구에서 연인이 된다는 게 얼마나 어색했는지, 며칠이 지나도록 그 어색함이 풀리질 않았다. 그래도 둘다 싱글벙글이었다. 당시 나는 강화에서 인천까지 버스를 타고 학교를 다녔는데, 이른 시간 버스에서 항상 아내의 모닝콜을 해주곤 했다. 그렇게 우리의 연애는 시작되었고, 그게 그렇게 오래 연애를 하게 될 줄 몰랐다.


이듬 해, 둘 다 대학을 가게 되면서부터 삐걱대기 시작했다. 연애의 초반은 달콤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의 성격 차이로 인해 많이 싸우기도 했다. 그리고 나를 구속하지 말라며 아내에게 숱한 이별을 통보했었다. 이전처럼 매일 보지도 못하고, 전화 너머로 만나는 날이 많아질 수록 그 골은 깊어졌다.


ROTC를 시작하면서부터, 나의 대학 생활의 스트레스는 극으로 치닫게 되었다. 자유로운 대학의 캠퍼스 내에서 자유롭지 못한 제복의 무리. 그리고 그 무리의 규율을 책임져야 했던 나로서는 매번 불려가고, 혼나고, 기합을 받았다. 그러면서 연애라는 것 자체가 내게 짐으로만 느껴졌던 것 같다. 학교에서도 연락 제대로 못했다고 혼나는데, 너한테도 똑같이 혼나야돼? 이게 당시의 나다.(사춘기x100)


ROTC 입단식에 온 아내


그 시절에 엄청 헤어졌다. 아내와의 성격 차이는 아내의 많은 양보로 극복되어가고 있었지만, 나의 스트레스는 극복이 되지 못했다. 아내는 영문도 모를 이별 통보를 몇 번이고 감내해야했다. 짧게는 며칠, 길게는 3개월까지 헤어지게 되면서 아내를 정말 힘들게 했다. 다른 여자들은 고무신 신는다고 하면 2년이 채 안되는 시간이겠지만 아내는 당시 ROTC 2년에, 군 복무 2년 4개월... 장장 4년동안 고무신을 신어야 했다.




그렇게 군 생활을 마쳤을 때, 나와 아내는 처음 만났던 강화도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나는 취업 준비를 위해, 아내는 일을 하기 위해 강화에 있었거든. 연애를 시작하고, 이렇게 매일 볼 수 있던 날이 많지 않았더랬다. 이미 6년째 연애 중이었지만, 서로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새로운 연애를 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갑자기 결혼 박람회에 가보자고 한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데이트 겸 가봐서 나쁠 건 없다며 나를 데리고 갔다. 그래, 나같은 백수 주제에 어짜피 결혼은 멀었어. 라고 생각하고 따라 나섰는데, 박람회 장에서 나온 나에겐 계약금 결제 영수증이 들려 있었다. 이렇게 싼 기회는 다시 안 올거라며 결제를 부추긴 그녀. 그렇게 기약없는 스드메에 계약금을 걸었다.


그렇게 한 해가 지날 무렵. 아내의 식구(처가댁)들과 저녁을 먹게 되었다. 장인 어른이 한 잔, 두 잔 하시더니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신다.


"너네 결혼해라."


밥 먹다가 갑자기 결혼이라뇨... 아무래도 일전에 아내가 넌지시 결혼에 대해서 이야기 했던게 장인 어른 머릿속에 계속 맴도셨던 모양이다. 며칠동안 고민하시다가 말씀하셨단 걸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시작해보기로 했다. 나는 그때까지도 아르바이트 외에 직장이 없던 백수였다. 그리고 갑자기 개발을 공부하겠다며 서울로 상경해, 반지하 방에서 지내며 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통장에는 군 전역을 하면서 가지고 나온 퇴직금이 일부 있을 뿐, 가진 돈도 별로 없었다. 국비지원학원에서 지원해주는 30여만원이 나의 수입의 전부였었다.


그렇게 상견례를 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난 내년에 학원 수료하면 바로 취업할 수 있습니다. 라는 별 근거도 없는 뻘소리를 했다. 그렇게라도 양가 부모님들의 걱정을 덜고 싶었던 것 같다. 아내는 번듯한 직장이 있었지만 나는 고작 학원 다니는 백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도 이상하지만, 우리 양가 부모님들도 이해가 안된다. 대체 나란 '남자'의 뭘 보고 결혼을 허락하신걸까? 그렇게 상견례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결혼 준비가 시작되었다.


엄청난 양의 청첩장 샘플
지인에게 부탁한 결혼 스냅샷


말이 씨가 된 건지, 다행히도 학원 수료가 끝나기도 전에 나는 취업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해 9월 드디어 결혼을 했다.


우리의 첫 집, 보따리 하나 싸들고 시작했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우리는 이미 결혼 7년 차에 접어들었고, 처음 만난 지는 5,000일이 넘는 날들이 흘렀다. 동안 서로를 믿어주며, 본인의 가장 양보하기 힘든 것들을 양보하며 조화를 이뤄가고 있다.


동시에 큰 변화들도 있었다. 아내는 안정적인 공기업에서 벗어나 나와 함께 개발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제작년에는 우리가 원하는게 무엇인지 탐구하기 위해 반 년간 세계 여행을 함께 다녀왔다. 그리고 현재, 우리 부부는 한국이 아닌 해외에서의 삶을 준비하고 있다. 서로의 눈빛에서 같은 열정을 볼 수 있다는 것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이 글을 빌어, 숱한 헤어짐 속에서도 나를 붙잡아 주었던, 그리고 늘 곁에서 긍정적으로, 힘을 복돋아주는 아내에게 감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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