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들과 알프스로 휴가를 떠났던 버거씨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를 픽업하기 위해 낭시에 들렀다.
하룻밤 지낼 가방을 챙겨서 차에 올라탔더니 뒷좌석에 새카맣게 그을린 두 아들이 나를 보고 수줍게 인사를 건넸다.
"휴가 재미있었어? 세 명단 제대로 그을렸네!"
세 남자는 휴가가 너무 재미있었다고 한 마디씩 대답을 했다. 열흘동안 힘들게 놀고 10시간 넘도록 차 안에 있었는데 어느 누구도 피곤한 기색은 전혀 없었다. 덩달아 나까지 휴가에 다녀온 기분이 들었다.
아들들은 가는 길에 엄마네 집에 내려다 주고 우리 둘만 버거씨의 누나부부가 기다리고 있는 버거씨 집으로 갔다.
"긴장되지 않아?"
"아니? 나 긴장해야 돼? 아참! 어릴 적에 누나가 많이 괴롭혔다고 했지? 누나가 나도 괴롭힐까?"
버거씨는 내 농담에 어이없다는 듯이 껄껄 웃었다. 내가 긴장하지 않아 다행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버거씨네 집에 도착했을 때 누나네 부부는 마치 집주인인 것처럼 나와서 우리를 맞아주었고 우리는 오히려 방문객인 것처럼 누나네 에스코트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에어비앤비 숙소가 꽤 만족스러웠어요. 후가 잘 써드릴게요."
누나네 부부의 농담이었다.
버거씨와 한 살 차이가 나는 누나는 심리상담을 전공한 후 학교에서 학생들을 상담하는 일을 한다고 한다. 버거씨와 누나는 어릴 적 부모님이 이혼하신 후 지금까지 서로를 가장 의지하며 가깝게 지내는 사이좋은 남매이다.
시원한 맥주 한 병을 얻어들고 테라스 테닝의자에 앉아있는 누나의 곁으로 가서 나도 앉았다.
누나는 처음에 좀 어색해하는 것 같았는데 내가 자연스럽게 다가가니 매우 친근하고 대해주었다. 특히 내가 프랑스어가 부족하다고 했더니 아니라고, 정말 잘한다고 칭찬해 주었고 헷갈리는 단어를 내가 물어볼 때마다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주면서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남자들은 바비큐를 준비했다.
누나네가 우리를 위해 미리 저녁거리들을 장 봐온 덕분에 뚝딱뚝딱 준비할 수가 있었다.
라따뚜이와 큼직한 립 한 조각.
다들 두 손으로 뜯어먹었는데 너무너무 맛있었다.
후식으로는 누나가 과일을 손질해서 내왔다.
정원 구석에서 자라고 있던 민트잎들도 데코에 한몫을 했다.
배불리 다 먹고 났을 때 버거씨가 아이스크림을 들고 나오는 순간 다들 아이처럼 환호를 했다. 나만 큰소리로 환호한 게 아니라서 기뻤다.
버거씨는 식사 내내 휴가이야기를 들려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버거씨는 원래부터 말이 많았나요?"
내 말에 누나네 부부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내가 투머치토커에 얽힌 에피소드 몇 가지를 들려주었더니 두 사람은 웃느라 쓰러졌다.
누나네 커플은 이곳에서 머무는 동안 너무 즐거웠다고 했다.
"여긴 너무 평화로워. 아침저녁 공기가 선선할 때면 우리는 태닝의자에 나란히 앉아 책을 읽거나 대화를 했어. 근처 숲길을 산책하다가 2차 대전 때 길게 지어진 마지노(maginot)를 발견하기도 했어. 여긴 어딜 가든 다 그림 같아."
내가 마지노가 뭐냐고 묻자 다들 앞다투어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전쟁 때 벽을 높이 쌓아놓고 방어하는 콘크리트 건물이야. 마을을 관통하도록 아주 길게 구축되어 있어. 이 근처 숲을 걷다 보면 쉽게 찾아낼 수가 있지."
그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 바로 마지노선! 전쟁 때 저지선을 뜻하는 마지노라는 프랑스어 단어에서 마지노선이 파생된 것인가 보다!! 이 깨달음을 나눌 상대가 여기엔 없으니 나 혼자 조용히 무릎을 탁 쳤을 뿐이다.
저녁식사가 끝난 후 우리는 거실에서 영화를 보았다.
일본영화 [퍼펙트데이즈]라는 영화였다. 도쿄의 공공화장실 청소를 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나오자 버거씨가 뿌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내년에 혜연이랑 한국 간다?"
그 말에 나와 누나가 동시에 대답했다.
"진짜?"
"정말로?"
내 목소리에 버거씨가 히잉- 하고 울상을 지었고 누나와 매형이 크게 웃었다.
"내년에 너 한국 갈 때 나도 같이 가기로 한 거 아니야?"
"좀 있다 얘기하자..."
내 대답에 누나와 매형이 버거씨를 또 놀렸다. 나는 내년 말고 그다음에 가면 되지... 하고 대충 얼버무렸다.
영화는 사실 개인적으로 나에게 큰 심금을 울렸다. 화장실 청소를 하면서 소소한 기쁨으로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씩씩하게 살던 남자가 마지막 장면에서 복잡한 표정으로 엉엉 우는 모습은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벌써 끝났어? 그래서 완벽한 날은 언제 오는 건데? 영화 2편에서 봐야 하는 건가?"
"내 말이. 이제 완벽한 날이 오나 보다 했는데 끝나버렸네."
누나와 매형의 영화평이었다. 나는 생각이 많아져서 아무 말하지 않고 있었는데 버거씨가 말했다.
"사실 나는 영화가 너무 인상적이었어. 저 남자는 부잣집에서 편히 살 수도 있었을 텐데 무슨 사정인지 남들이 무시하는 일을 하고 있잖아. 그럼에도 굉장히 행복한 모습이야. 나무와 하늘을 수시로 올려다보면서 웃는 모습이 나는 너무 보기 좋았어. 남들에게 보이는 모습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게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살아야 할 것 같아."
버거씨의 평에 내가 말을 이었다.
"사람들이 저 남자의 친절을 무시하거나 심지어 투명인간처럼 대하는 모습이 여러 번 나오는데 그는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하지만 마지막 우는 모습을 보니 사실은 굉장히 외로웠던 거야. 생각이 많아지네..."
누나와 매형은 말없이 우리 얘기를 듣더니 이렇게 서로 속삭였다.
"쟤네 둘이 잘 어울리네..."
그러네 버거씨가 이 영화를 보고 나와 비슷한 것을 느꼈다니 괜히 기특해 보인다.
누나네 부부와의 첫 만남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우리는 밤이 늦도록 수다를 떨었고 많이 웃으며 친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