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버거씨랑 일요일 오후에 산책하러 공원에 갔다. 이번에는 집 근처 페피니에 공원 말고 좀 더 걸어서 성마리 공원으로 갔다. 시댁이 있던 동네 근처라 그쪽으로 안 간 지 꽤 오래됐었는데 이제는 점점 무뎌지고 있는 느낌이다. 좋은 신호.
공원에는 가을이 찾아왔다. 온통 노랗고 빨갛게 물든 공원에는 가족단위로 나와 즐겁게 산책하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우리는 어쩌다 보니 꼬맹이 둘을 데리고 산책을 나온 젊은 부부 뒤를 따라 걷게 되었다. 아이들 때문에 걸음이 느린 그 가족들을 위해 우리는 느긋하게 뒤 따라 걷고 있었다. 늦게서야 우리를 발견한 부부는 우리가 먼저 갈 수 있도록 아이들을 길 한쪽으로 몰았다.
"Merci."
인사를 하고 지나가는데 4살쯤 된 여자아이가 우리 얼굴을 빤해 쳐다봤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결국 엄마아빠에게 큰소리로 불만을 토로하는 꼬맹이.
"왜 저 사람들이 먼저 가는 거야?"
그 목소리가 그저 무해하고 사랑스러워서 나와 버거씨는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의 부모도 따라 웃으며 딸에게 대답해 줬다.
"왜냐면 우리가 너무 느리기 때문이지. 너희가 걷는 속도가 너무 느리잖아."
소녀는 그 말을 이해했을까. 너무 귀엽다!
공원 맞은편에는 낭시 온천스파가 있다.
"오 이거 뭐야?! 완전 좋잖아! 왜 우린 여기에 한 번도 안 온 거야? 왜~~~ 아~~~ 나 이런 거 진짜 좋아하는데....!!! “
눈이 휘둥그레진 버거씨가 아이처럼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알았어. 우리도 여기 오자."
"언제? 내년에?"
"아니 올해."
"올해 언제?"
"몰라. 일단 봐서..."
"다음 주에 오면 안 돼? 다음 주에 오자 다음 주. 다음 주에도 내가 낭시로 올게."
그러면 버거씨는 3주 연속으로 낭시에 오는 거다. 뭐.. 그래... 다음 주에 떼말에 오자...
내 말에 버거씨는 신이 났다.
우리는 공원을 한 바퀴 돌고 나서 잠깐 벤치에 앉았다. 강아지들이나 아이들과 행복한 표정으로 산책하는 다양한 가족들을 구경했다.
"나 이 공원에 자주 왔었다? 가족단위로 산책이나 피크닉 나온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도 곧 저렇게 내 아이와 아이의 아빠, 혹은 아이의 할머니 할아버지랑 주말마다 이곳에 나오겠지 생각했었어. 그땐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던 미래라 의심한 적이 없었지."
잠자코 내 말을 경청하는 버거씨. 나는 너무 무거워지지 않으려고 목에 힘을 뺐다.
"이번 생에는 나 저런 거 못 겪어보겠네. 이제는 단념했으니까 걱정 마."
진짜로 단념했다. 한 생명의 인생을 책임질 자신이 이제는 없다. 홀가분해진 내 인생의 무게를 이제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도 궁금하기는 하다...
"근데... 어땠어? 당신은 다 해 봤잖아. 애들 어렸을 때 애들 엄마랑 애들이랑 저렇게 공원에도 나오고 그랬겠지? 좋았어?"
버거씨는 신중하게 대답하려는 듯 뜸을 들였다. 그리고 잠시 후 무겁게 입을 뗐다.
"응... 나도 해 봤지. 저런 거... 부정하진 않겠어. 우리도 저렇게 한때는 행복했으니까. 그런데... 마음고생이 심했어. 일단 애들 엄마랑 불화가 이미 깊어졌을 때 둘째를 낳았거든. 그녀의 우울증은 날로 심해졌고 그게 첫째한테도 영향이 가더라. 부부싸움도 많이 했고 그 와중에 나는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 하기 위해 열심히 돈 버는데 우선적으로 열중했어. 부담감이 심했지... 꿈에 그리던 직장에 드디어 입사를 했는데 처음 몇 년간은 업무가 너무 힘들어서 스트레스가 심했어. 무리해서 대출을 받아 집까지 샀는데 결국 애들 엄마는 헤어지자고 하더라. 그녀가 그 말을 꺼내기 전까지 나는 단 한 번도 그녀와 헤어지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 19살에 그녀를 만난 이후부터 그녀 이외의 다른 삶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거든. 아무리 나를 힘들게 해도 그녀는 내 아이들의 엄마였고 내 동반자였는데... 그런데 그녀가 그 말을 꺼냈을 때 내 기분이 어땠는 줄 알아? 솔직히 홀가분하더라..."
이번에는 버거씨가 담담하게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내가 조용히 경청했다.
"어땠냐는 너의 질문에 답을 하자면 말이야. 좋았던 기억도 분명 있지만 그 시절을 되돌아보면 힘들었던 기억이 먼저 떠올라... 아빠로서의 책임감이 두렵기도 했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지만 가정에서도 힘들었고 직장에서 치열했던 기억이 더 많아..."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버거씨는 첫째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너무 힘들었던 이야기들, 아이들 엄마와의 갈등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는데 듣기만 해도 혼자 정말 외로웠겠다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들어 안쓰러웠다.
"나는 지금이 가장 행복해. 내 인생은 지금 50대부터 다시 시작되는 기분이야. 2년만 있으면 둘째도 성인이 될 거야. 그 후로도 나는 아이들이 아빠가 필요한 순간에는 그 자리에 있어 주겠지만 나는 내 인생을 먼저 살 거야. 나한테는 이제 네가 넘버원이야."
이번에도 이렇게 훅 들어오는 고백.
매번 들어도 감동적이기는 하다.
"네가 이번 생에 엄마가 되지 못한 걸로 슬퍼한다면 나는 거기에 대해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 하지만 그 외에 네가 원하는 모든 것들은 내가 다 해 줄 수 있어. 너만 내 옆에 있다면 나는 뭐든지 할 수 있고 우리는 함께 행복할 수 있어. 내 남은 인생의 목표는 너를 행복하게 만드는 거야."
으...
"이거 프러포즈야?"
"당연하지. 나는 요즘 너와의 미래를 매일 꿈꿔. 나를 얼마나 행복하게 만드는지 몰라. 네가 내 여자친구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야. 나는 정말 행운아구나! 네가 삶을 바라보는 방식을 나는 존경하고 배우고 있어. 옆에서 널 지켜보면서 내 삶까지 바뀌고 있어. 내 여자친구는~ 세상에서 가장 현명하고~ 제일 예쁘고~ 제일 웃기고~ 제일 귀엽고~~ 이 세상 최고의 여자야!"
나도 뭔가 보답의 멘트를 들려줘야 하는데.
"고마워. 당신은~ 이 세상 최고의~ 갸헝이야."
내 말에 버거씨가 빵 터졌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웃겨서 같이 시원하게 웃었다. (갸헝: 보증인)
"그래 너도 이 세상 최고의 세입자야. 거봐 우리는 이렇게나 완벽한 한 팀이지!"
가을이 찾아왔는데 내 인생에는 봄이 오려나… 심장이 간질간질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