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
남편과 시부모님의 요구로 2023년에 내가 서명했던 Separation de bien 서류를 버거씨에게 보여주었다.
변호사를 만나기 전에 자기가 한 번 봐도 되겠느냐며 버거씨가 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류를 읽는 버거씨 표정이 점점 심각해졌다. 인터넷으로 뭔가를 검색을 해 보더니 한숨을 길게 내쉬는 버거씨. 한참 후 무겁게 입을 열었다.
"네 전남편은 이게 결혼 계약서가 아니라고 했다고?... 충격적 이게도 결혼 계약서가 맞아. 나는 네가 2023년에 서명했다길래 그 이전까지의 결혼 생활에 대해서는 네가 재산 분할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이 서류는 네가 결혼한 2016년부터 소급적용이 되도록 작성이 되어있어... 정말 네 넘편도 너희 시어머니도 무서운 사람들이다. 나쁜 사람들이야..."
"... 프랑스에서는 다 이렇게 한다던데?"
"아니 그렇지 않아... 하아.... 우리,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이런 나쁜 가족으로부터 탈출했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어떻게 사람들이 이렇게 사악할 수가 있지... 외국인 부인, 외국인 며느리가 남편 한 사람만 보고 먼 나라까지 왔는데... 참내... 너 아파트 구할 때 보증인도 안 해줬다길래 정말 놀랐었는데 심지어 이것까지..."
이 말을 들으니 마음 깊숙이 묻어두었던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이러려고 그때 그랬구나...
전남편과 아파트를 구입하기로 결정했던 재작년 여름 우리는 정말로 행복했다.
아파트 가격이 결코 싼 편이 아니었지만 그는 나에게 돈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본인이 다 알아서 하겠다고.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시어머니께서 연락도 없이 우리 집에 들이닥치셨다. 표현 그대로 마치 강풍을 몰고 오듯 무서운 기세로 들어오셨다. 아버님은 뒤늦게 조용히 따라 들어오셨다.
시어머니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커피 드릴까요?"
"아니다. 네 남편은 아직 자니? 깨워와서 같이 앉거라."
아침에 유독 더 심해진다는 우울증으로 인해 전남편은 늦잠을 자다 말고 까치머리를 한채 부랴부랴 거실로 나왔다.
시어머니는 서론도 없이 내 눈을 똑바로 보며 말씀하셨다.
"너, 아파트 사는데 얼마 낼 거냐?"
시어머니의 목소리는 우렁찼고 그 기세에 당황한 나는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우물쭈물 생각해 낸 내 대답은 이러했다.
"많이는 못 내고요... 낼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보탤 거예요..."
시어머니는 물러서지 않으셨다.
"그래서 얼마?"
"한국 계좌에.. 많지는 않아요..."
나는 수치심에 눈물이 날 것 같은데 어머님은 여전히 만족스럽지 않은지 테이블을 두드리며 다시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숫! 자! 를 말해다오."
치욕감에 올라오는 눈물을 꾹꾹 눌러 참다가 어머님의 차가운 표정을 마주한 후부터 내 심장이 차가워졌다. 똑같은 대답이었지만 이번에는 단호한 목소리로 힘주어서 다시 말했다. 어머님의 질문에 내가 답변을 해야 할 의무가 없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던 것이다.
이제야 잠이 깼는지 전남편이 어머님께 화를 냈다. 연락도 없이 갑자기 찾아와서 지금 뭐 하시는 거냐... 지금 우리 아파트를 사는 거지 엄마 아파트가 아니다. 신경 끄시라... 그리고 다음에 올 때는 꼭 미리 연락을 주고 오시라고 언성 높여 말했다. 하지만 어머님께서는 개의치 않으셨고 여전히 당당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밤새 생각해 봤는데 너네 아파트 사는 거 우리가 도와주마. 유산을 미리 주거나 빌려주거나. 그걸 결정하기 위해 나는 혜연이 얼마를 낼 수 있는지 알아야 했어."
밤새 그 생각만 하다 한숨도 못 자고 아침이 되자마자 달려오셨나 보다. 아침이 되자마자 혜연한테 얼마 낼 건지 물어봐야지 하고 말이다.
우리 부모님은 오빠네가 아파트를 산다고 했을 때 새언니가 얼마를 내는지 궁금하셨을까. 이 모습을 우리 부모님이 보셨으면 무슨 생각이 드셨을까.
시부모님이 떠난 후 그제야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전남편은 걱정하지 말라고, 엄마가 돈 갖고 우리 일에 더 간섭할 것 같으니 차라리 은행에서 빌리는 게 나을지 모르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아파트 가격 중 절반 가까이에 해당하는 금액을 시부모님으로부터 도움받았다. 나머지 금액은 본인이 가진 현금으로, 은행 대출 없이 치렀다.
얼마 후 공증사무소에서 아파트 계약을 하면서 그 가족은 나에게도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Separation de bien. 서명하란다.
내가 한 푼도 안 냈으니까 이 아파트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지 말라는 거구나. 치사하지만 일전에 시어머니께 받은 그 치욕이 떠올라 그냥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서명해 줬다.
공증인은 나에게 몇 번이나 강조했다. 이혼을 하게 되면 결혼 전에 내 소유였던 재산만 갖고 떠나는 거라고.
프랑스로 올 때 빈손으로 왔으니 빈손으로 가라는 거구나.
당시 한창 임신에 집착하면서 인공수정에 매달릴 때였는데 이 사람들은 돈 앞에서 나를 울타리 밖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돈 앞에서 너는 우리 가족이 아니야. 이 선 밖으로 꺼져줄래...
새 아파트에 놀러 오실 때마다 시어머니는 목에 힘주어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새 아파트 너무 좋다. 너도 너희 아파트 너무 좋지?"
매번 못 들은 척했지만 내 대답을 강요하실 때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거 제 것 아닌데요?"
"네 남편이 죽으면 네 거지."
하...
나는 아무 대꾸 없이 물끄러미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러면 조금 부끄러운 마음이 드시려나.
우리가 이혼하기로 했다고 시댁에서 울면서 말씀드렸을 때 어머님은 나더러 본인의 친구가 빈 스튜디오를 소유하고 있으니 그 집에서 잠시 지낼 수 있도록 연락을 해 주겠다고 하셨다.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서두르셨다. 어차피 달리 갈 데가 없으니 그냥 감사하다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같은 날 저녁 어머님은 대학생들이 머무는 아파트호텔 리스트를 계속해서 나에게 보내셨다.
"내 친구네 집에서 네가 영원히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어서 빨리 다른 집을 알아봐야지! 이 집 괜찮은 것 같은데 어떠냐?"
아직 그녀의 친구집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벌써 쫓아내시려는 건가. 하나같이 보증인이 필요 없는 비싼 아파트들... 역시 전남편처럼 시부모님도 내 보증인이 되어줄 생각은 없으셨던가보다.
그리고 그게 끝이 아니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게 있다. 네가 네 의지대로 집을 나간다는 내용을 적어서 서명해 다오."
이때부터 독하게 마음을 먹게 되었다.
이제 정말로 시어머니를 믿으면 안 되겠구나. 내 힘으로 살아남아야 한다.
당시 에리카의 조언으로 퇴직한 변호사가 무료로 상담을 해 주는 기관을 찾아갔다. 거기서 말하길, 시어머니가 요구하는 그 서류는, 마음만 먹으면 그쪽에서 나를 프랑스에서 추방시킬 수 있는 효력을 가질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니 시어머니가 요구하는 그 어떤 서류에도 앞으로는 사인하지 말라고 했다.
시어머니는 그만큼 치밀하고 무서운 사람이었다.
나는 그동안 어디 가서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버거씨에게 다 쏟아냈다. (지금은 그 일부만 작성하는 중이다.) 버거씨는 혀를 찼고 나보다 더 흥분하기도 했다. 공감해 주는 사람이 있으니 묵혀둔 이야기를 눈물로 한바탕 후련하게 쏟아낼 수 있었다.
버거씨는 진심으로 나를 위로했다.
앞으로는 세상 그 누구도 나를 마음대로 이용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그거면 되었다.
사람과 돈. 그중 내 선택은 언제나 사람이다.
그리고 그들의 선택은 나와 달랐다. 그런 사람들과 결국 이렇게 남남이 된 건 정말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