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나는 신의 존재를 인정한다. 앞으로 신과 함께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하는 숙제가 남았다. 돌이켜보면 신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건 중학생 무렵이었다. 그때의 나는 진정한 대화 상대가 없었다. 나의 모든 것을 꺼낼 수 있는 파트너는 나였다. 신을 소환해 나의 결핍을 채우려 했다. 신은 나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혼자서도 희로애락을 느낄 수 있도록, 상상력에 부스터를 달아주었다. 그리고 나는 방문을 걸어 잠갔다.
사춘기 시절부터 나의 카운터 파트너는 또 다른 나이자 신이었다.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신과 함께 실현시켰다. 신에게는 가치 판단이 없었다. 내가 꿈꾸는 체험을 모두 눈앞에 가져다주었다. 물건을 원하면 물건을 가져다주고, 어떤 장면을 원하면 그 장면을 가져다주었다. 그것들이 나의 몸과 마음을 해치고, 깊은 슬픔과 괴로움을 가져올지라도 선물 상자에 포장해 머리 곁에 놔두었다. 나의 호기심은 불안과 공포를 누르고, 기어이 선물 상자의 리본 끈을 풀었다. 그 뒤에 이건 내가 원하던 것이 아니라고 항변해 보아도,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내가 그린 모든 것들을 신은 가져다줄 뿐이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에도 끔찍한 기억으로 남은 신의 선물은 깨달음의 재료가 되었다. 트라우마는 호기심의 대가를 예측하지 못한 나의 책임일 뿐, 신은 나에게 모든 것을 주었다.
더 이상 나에게 유신론과 무신론의 선택은 중요하지 않다. 기독교인, 불교인, 이슬람교인, 가톨릭 교인, 힌두교인 등 모든 종교인을 포용한다. 종교가 더 이상 나의 시야에 색안경을 끼우진 못한다. 나는 ‘종교를 믿냐 안 믿냐’라는 관념에서 벗어났다. 각 종교의 논리와 주장은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데 지침이 될 뿐이다. 나는 더 이상 믿는 자와 안 믿는 자로 구분되지 않고 구분하지도 않는다. 종교는 나의 필요에 의해 선택될 뿐이다.
신에 대한 분노는 스스로에 대한 분노였다. 신이라는 관념 속에 갇혀 주체성을 찾기 위한 덧없는 여정은 이제 멈췄다. 모든 것을 믿고 동시에 믿지 않으며 자유로이 살아갈 때, 나는 비로소 주체적인 인간이 된다. 신이라는 관념은 실존할 수도 있고, 연약한 인간이 만들어놓은 프레임일 수도 있다. 그것의 진실을 밝히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삶의 의미를 알기 위한 대가로 무의미한 시간과 정신적 고통이 요구되듯이, 신의 존재는 알 수도 알 필요도 없다. 상상의 영역이며,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는 나의 친구이자 동료, 가족이다. 모든 부모가 아이에게 좋은 것만을 줄 수 없듯이, 신도 좋은 것만을 주지 않는다. 현실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자세는 오롯이 나의 몫이다. 신은 뒤에서 가만히 미소를 띠며 등을 토닥여줄 뿐이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이 한 가지 있다.
우리의 궁극 목표가 어떤 것이든 우리 자신을 신의 손에 내맡기는 것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건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렇게 될 때 그 일은 우리에게 좋은 일이 된다.
- 앙리 프레데릭 아미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