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나는 아침에 빨래도 하고, 브런치 글도 썼다. 하지만 하루가 끝날 무렵, 이상하게도 아무것도 안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ADHD 특성상 늘 새로운 자극을 찾아 움직이고, 에너지를 과잉 사용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 같은 쉬는 날까지 나를 절제하고 싶지는 않았다.
무언가 재미있는 걸 찾기 위해 유튜브도 보고, AI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했지만, 결국 마음에 드는 건 하나도 없었다.
회사에서도 나는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하고 자주 자리를 이석한다.
이걸 그냥 ‘참아야 할 문제’로 보기에는 꽤 고통스럽다.
AI에게 물어보니, 앉아 있으면서도 자극을 줄 수 있는 슬라임이나 스퀴시 같은 것을 추천해줬다.
그 순간 나는 마치 슬라임이 없으면 안 되는 사람처럼 상상에 빠졌고, 내일 회사에서 슬라임을 주물럭거리는 나의 모습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 상상만으로 당장 씻고, 옷 갈아입고, 마트에 가는 건 너무 귀찮았다.
지금까지 슬라임 없이도 회사 잘 다녔는데 굳이 지금 사러 나가야 하나?
그렇다고 안 나가면 또 무기력하게 앉아 있다가 핸드폰이나 뒤적거리며 자극을 찾아 헤맬 텐데…
결국 30분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때 내 담당 의사 선생님의 말이 떠올랐다.
"생각만 하지 말고 말로 해보세요."
그래서 나 스스로에게 말했다.
“나 지금 씻을 거야.”
말을 하자 머릿속에 '씻어야 한다'는 뚜렷한 계획이 생겼고, 이게 나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미적미적 거리며 씻고 옷 갈아입고 밥도 먹고, 밖으로 나왔다.
산책 겸 마트에 가기위해 걷기 시작했다.
밖은 시원했고, 바람도 적당했다.
내가 괜히 고민했나 싶었다.
저녁이라 자동차 불빛은 반딧불이처럼 보였고, 공기는 촉촉한 수분감이 느껴졌다.
쓰레기 버리는 날이라 그런지 길가엔 봉투가 모여 있었고, 사람들은 오늘도 부지런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동네 풍경을 천천히 관찰하며 마음속에 하나하나 저장하듯 걸었다.
마트에 도착해 2층 문구 코너로 향했고, 슬라임과 스퀴시를 골랐다.
모기약 사러 갔다가 모기약 빼고 다 산 기억이 떠올라 오늘은 정신을 바짝 차렸다.
슬라임을 들고 계산대로 향하던 중, 새들을 보았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새들이 귀여워 한참을 지켜봤다.
그 옆의 금붕어들도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1층 식품 코너로 내려와 이것저것 구경하던 중, 땅콩과 요플레, 음료수를 샀다.
그리고 바로 옆에 있는 올리브영에 들어가 마스크팩까지 구입했다.
세일 중이었기에 고민도 하지 않았다.
기분 좋게 장을 보고 나오던 길, 밤하늘과 가로등을 바라보다가 문득 좀비가 떠올랐다.
내 상상속 좀비는 무섭지 않았다.
귀엽고 게으른 판다 같은 좀비였다.
사람들은 그 좀비를 귀여워했고 귀엽다는 이유로 좀비 보호센터까지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지역주민들 반대가 심했지만, 관광객이 몰리면서 지역 경제가 살아나자 오히려 지자체가 좀비를 적극적으로 홍보하며 돌보게 되었다.
게다가 연구 결과, 좀비는 원래 육식 구조를 가졌지만 너무 게을러서 채소만 먹는 채식 좀비가 되었다고 한다.
게으르고 움직임이 적은 건 에너지 보존 때문이었다.
판다 좀비를 여기까지 상상하다 보니 나는 어느새 집에 도착했고, 집에 도착하는 순간 좀비는 내 뇌에서 퇴장했다.
장바구니를 방 한쪽에 내려두고, 나는 슬라임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여기까지가 오늘의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