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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근화 Oct 02. 2020

자유를 갈망하는 괴물

진격의 거인에 바치는 추천사

 가위바위보도 이기고 봐야 한다는 한일전이지만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격차가 있음을 인정해야만 하는 분야가 몇 가지 있는데, 가장 대표적으로 만화 산업을 꼽을 수 있겠다. 아무리 K 웹툰의 글로벌 성장세가 두드러진다고 한들 우리는 아직도 원나블에 준하는 세계적인 문화 상품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으며 만화를 기반으로 만드는 애니메이션으로 넘어가면 그 격차는 훨씬 더 벌어진다. 인정하긴 싫지만 그런 격차가 발생한 데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원인은 역시 컨텐츠의 수준 차이에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의 만화들은 한국의 그것에 비해 더 재미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단순히 재미있기만 한 만화를 넘어서 진지하고 깊이 있는 주제를 다루는 예술 작품에 가까운 만화들도 존재감을 드러내는 듯하다. 이제는 만화를 넘어 예술 작품의 수준에까지 이르고 있는 작품, K 웹툰의 팬으로서 이웃 나라에 더 큰 부러움을 느끼게 만드는 작품. 2010년대 일본 만화계에 가장 큰 반향을 일으킨 ‘진격의 거인’에 바치는 수식어다.     


 어느새 연재 10년 차가 되어 완결을 향해 달리고 있는 진격의 거인은 애들 보라고 만든 보통 만화와는 다르게 매우 무겁고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전개된다. 우정도 사랑도 개그컷도 서비스신도 철저히 배제한 이 만화가 지향하는 단 하나의 가치는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인 ‘자유를 향한 소망’이다. 주제만 들어도 이미 드라마가 만들어지는 것 같다. 자유를 갈망하는 주인공이 있고 그를 억압하는 악당들이 있다. 주인공은 실력으로 악당을 넘어서기 위해 노력하며 그 노력이 결실을 맺어 마침내 그토록 바라던 자유를 거머쥔다.     


 진격의 거인은 그 단순한 플롯에 대한 기대를 완벽히 배신하며 매우 독특하면서도 매력적인 이야기로 나아간다. ‘자유’를 향한 주인공의 갈망은 상상 이상이다. 보통의 만화 주인공이라면 자신의 소망을 달성하기 위해 무고한 타인의 권리를 침해해야만 하는 상황이 오면 갈등 끝에 자신의 소망을 포기하기 마련이다. 그래야 착해 보이고, 착해야 독자가 감정을 이입할 테니까. 하지만 본 작품의 주인공 앨런은 자유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타인의 기본권을 짓밟을 수도 있는, 작품 속의 어휘로는 ‘괴물’로 표현되는 인물이다. 여기서 말하는 기본권 침해의 범위는 목숨을 앗아가는 행위까지 포함한다. 한 마디로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살생도 불사하는, 현실에서는 사이코패스라고 불릴만한 사람이 주인공이라는 얘기다.


 이렇게 커다란 인격적 결함이 있음에도 그는 주인공으로서 가치가 있고, 또 그를 중심으로 해서 이야기가 잘 굴러가는 중이다. 독자로서 도저히 저 자유에 눈이 먼 미치광이를 머리로 응원할 수는 없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동질감이 있기 때문이다.

 ‘저렇게 해서라도 얻고 싶을 만큼, 자유는 소중한 것이니까.’


 보통 우리는 무언가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다면 자연스럽게 그 목표를 이루고 싶은 이유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멋진 근육을 가지고 싶은 이유는 이성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이고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이유는 편안한 삶을 살고 싶어서이다. 그렇다면 앨런에게도 그런 ‘동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정상이다. 하지만 앨런은 정상적인 인물이 아니기에, ‘당신은 자유를 얻어서 무엇을 하고 싶은 겁니까?’라는 질문에 그는 대답할 수가 없다. 앨런에게 ‘자유’란 무언가 다른 목표를 위해 필요한 중간 수단이 아니다.


 그에게 자유란 인간으로 태어나 본능적으로 추구해야만 하는 본질적인 가치이며 달성 그 자체에 의미가 있을 뿐 그것으로 무언가를 한다는 생각 따위는 할 필요가 없는 궁극적 목표일 뿐이다. 그 순수하리만치 분명한 주인공의 집념을 보며, 설령 세상의 윤리적인 기준을 넘어서라도 추구할만한 가치가 ‘자유’에는 존재한다는 생각이 드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저 일상에서의 자유라는 것이 공기처럼 당연한 존재였기에 체감을 못 했을 뿐.

 앨런처럼 거대한 벽에 가로막혀 바다를 못 본 적도 없었고 그 때문에 물고기를 못 먹은 적도 없는 우리이기에 자유에 대한 집착도 그보다는 약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피를 봐서라도 목표를 쟁취하겠다는 그의 자세를 보며 내가 공기처럼 누리는 자유의 소중함을 새삼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만화와 현실의 차이를 느끼며 현실에서의 자유는 어떻게 성취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본다. 약간의 스포를 하자면 앨런이 자유를 성취하는 데 사용하는 방법은 결국 살생이다. 또 그는 작품 속의 설정상 수명이 그리 많이 남지 않은 상황이기에, 어차피 오래 못 살 인생 죽기 전에 완전한 자유를 얻어내야겠다는 화광반조에 가까운 태도도 그의 행동에 큰 동기가 되는 부분이 있다. 자유를 얻어서 무엇을 하겠냐는 질문에 답을 할 생각조차 없었겠지만, 그런 걸 생각할 이유도 시간적인 여유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현실은 반대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지금보다 더 큰 자유를 얻는다고 해도, 예를 들어 술 담배가 금지되어 있던 미성년자가 1월 1일이 지나 처음으로 술과 담배를 할 수 있다고 해도 그의 인생이 거기서 끝나지는 않는다. 자유를 얻은 이후의 삶을 계속 생각해야 하고, 술과 담배를 할 수 있음으로써 져야 하는 책임들도 도외시할 수가 없다. 장기적인 시각 없이 얻어낸 자유가 혁명 직후의 프랑스에 어떤 혼돈을 줬는지 우리는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다. 4.19혁명 직후의 우리나라가 다시 군부 독재 세력의 손아귀에 떨어진 것도 같은 맥락이다.     

 창업보다 수성이 어렵다는 옛 격언처럼, 결국은 유지의 문제다. 근육을 키워 이성의 호감을 샀다면 그 호감을 계속 붙들고 있을 궁리를 해야 하며 돈을 벌어서 윤택한 삶을 살게 되었다면 삶의 질이 떨어지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할지 고민해야 한다. 성취 이후에 딸려오는 여러 가지 책임들을 고려해 보면 자유가 꼭 좋기만 한 것인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부럽게도 앨런은 그런 의문에서 자유로운 사람이지만, 그의 고민은 동료들이 대신 짊어지게 되었다. 동료들은 처음에는 앨런과 마찬가지로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들이었고 앨런의 활약으로 그 성취를 일부 이뤄냈지만, 결국 인간의 선을 넘고자 하는 앨런에게는 반기를 들고 대립하는 중이다.      


 진격의 거인은 이처럼 입체적인 인물들이 많이 나와 자유를 추구하는 인간 군상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준다. 매력적인 스토리를 만들면서도 심오한 주제의식을 잘 살렸기에 평작의 경계를 아득히 뛰어넘을 수 있었다. 결말이 나지 않았지만 언젠가 난다면 보지 않은 사람들은 1화부터 정주행하는 시간을 가져 보길 권한다. 물론 봤던 사람들이 다시 보기에도 무척 훌륭한 작품이다. 해답을 얻을 수 없는 모호한 질문들이 머릿 속에 계속 떠오를 것이다.     


 그 질문들에 나름의 대답을 찾아내는 경험을 당신도 해 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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