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픽션의 탈을 쓴 상상력의 산물, 화폐전쟁 #1
<화폐전쟁> 서평
올 4월 있었던 국회의원 선거가 끝난 이후 유튜버들을 중심으로 전에 없던 양상의 논란이 크게 일어났다. 전국적인 단위의 선거 조작이 일어나 여당이 압승을 거둘 수 있었다는 부정선거 음모론이 그것이다. 초기에는 그들의 주장이 어느 정도 설득력을 얻었다. 각종 통계수치와 월터 미베인이라는 미국의 한 대학교수의 이름까지 들먹이며 총체적인 부정선거가 있었음을 주장하는 그들에게 지지자들은 후원 세례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의 주장은 하나하나 완벽하게 반박되어 4개월이 지난 지금은 거의 관심을 끌고 있지 못한 상황이다. 혹시나 아직도 그 음모론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선거 결과가 언젠가는 뒤집히리라 믿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이 책을 한 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적어도 음모론을 펼치고자 한다면, 이 정도 정성은 들이라는 뜻이다.
화폐전쟁은 400페이지가 넘어가는 분량에 경제학 용어가 마구 쏟아지는 본격적인 경제 교양서적이다. 하지만 그 압도적인 분량에도 불구하고 나는 꽤 재밌게 책을 완독 했다. 책이 재미있었던 이유는 내가 경제학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이 책이 실은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수백 년에 걸쳐 세상을 지배해 온 국제 금융 조직의 정체를 까발린다는 당당한 출사표를 내던지지만 실제 책의 내용은 일련의 역사적 사실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편집한 사실 기반 소설, 즉 팩션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음모론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점은 그 주장들이 교차 검증이 불가능한 뇌내 망상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라는 것이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부정선거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이 선거를 기획한 자들이 작전의 성공을 위해 선관위와 우체국을 매수했고, 정보가 유출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경찰까지 매수했다고 주장한다. 그럼 그 말을 듣는 사람이 묻는다. “당신들 주장이 사실이라면 매수당한 경찰이나 우체국 직원, 혹은 선관위 직원이 한 명이라도 등장해야 하지 않나요?” 이와 같은 합리적인 의문을 제기하면, 음모론자들의 대답은 국적과 시대를 불만하고 거의 비슷하게 나온다. “이번 작전의 흑막이 워낙 권력이 강하고 결속력이 튼튼한 조직이라 내부고발자가 나올 수 없다.” 우리의 주장은 타당하다. 그러나 그 타당성을 입증할 증인 혹은 증거들은 상대방이 워낙 철저하여 눈앞에 제시할 수는 없다. 그러니 일단은 믿어 달라…… 뭐 이런. 뭐 이런 논리인데, 세상에 어쩜 이렇게 인생을 편하게 살아가는 자들이 있단 말인가?
저자의 주장은 딱 이 수준에 머물러 있다. 미국 대통령 중 무려 9명이나 되는 사람에 대해 암살 기도가 있었고 그들은 하나같이 국제 금융 그룹의 의사에 반하는 정책을 밀어붙였다. 그 결과 그들은 금융 그룹에 제거 대상으로 찍히고 말았고 총탄과 독약에 의해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하지만 사건이 벌어진 지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났고 암살을 저지른 자들이 너무도 용의주도한 인물들이기 때문에 검증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독자들은 내 말을 믿을 필요가 있다. 두둥.
이러니 책이 어떻게 재밌지 않을 수 있을까. 지금까지 벌어진 미국 대통령 암살사건이 모두 한 세력이 저지른 범죄라는 얘기에는 뭇사람들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선정성이 들어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흥미롭기만 할 뿐, 이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저자의 주장을 종합해 보면 국제 금융 그룹의 자금력과 로비 능력을 합치면 사실상 미국 대통령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갈아치울 수 있다는 의미인데, 그런 능력이 있다면 진작 말 잘 듣는 바지사장들만 골라 앉히면 될 일을 굳이 반동분자를 앉혀 놓고 말을 안 들으면 암살한다? 효율성을 최고의 덕목으로 생각하는 금융가들이 뭐하러 그런 수고로움을 감수하겠는가? 더욱 황당한 점은 그 리스트에 로널드 레이건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 역사상 가장 재벌 친화적인 대통령 중 하나로 평가받는 그를 금융 조직이 죽인다? 무슨 이유로?
물론 미국 역대 대통령 중 9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암살자의 마수에 노출되었다는 사실은 꽤 놀랍게 다가올 수 있지만, 시기와 장소가 제각기 다른 아홉 건의 암살 기도가 있었다면 그 사건들이 각기 다른 범인들에 의해 벌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상식적이다. 그 모든 사건의 배후가 일괄적으로 국제 금융 조직이었다는 주장은 단순히 근거만 빈약한 수준이 아니라 합리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애초에 잘못된 전제 위에서 논의가 출발하고 있기에 책의 전반에 걸쳐서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읽으면 마치 무한동력기관의 개발을 제안하는 괴짜 발명가의 계획서를 읽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처음엔 정밀한 플롯을 가진 소설 작품으로 시작한 이 책은 마지막에 가서는 우스꽝스러운 코미디로 그 성질을 변화시켰다. 코미디가 절정에 이르는 부분은 언젠가 닥쳐올 달러의 가치 폭락이 현실로 다가올 때 중국이 제1의 패권 국가가 될 수 있는 전략이 무엇인지를 제안하는 마지막 장이다. 저자가 제안하는 전략을 한 문장으로 옮기면 이렇다. 금을 최대한 많이 사다 들이고, 금융 개방을 철저히 배격하며 은행의 권한을 절대로 늘리지 않는 것.
마치 1등을 하기 위해서는 공부를 열심히 하면 된다는 알맹이 없는 조언처럼, 저자는 너무 당연하면서도 일견 현실성이 없어 보이는 방안을 전략이랍시고 소개하고 있다. 그토록 전지전능하신 금융 조직에서 갖가지 이권을 볼모로 개방을 요구한다면, 전 세계의 made in china가 박힌 값싼 공산품을 팔아서 먹고사는 중국이 무슨 수로 그 요구를 물리친단 말인가? 책이 출판된 시점이 대략 10년 전인데, 2020년에 와서 보면 미국은 뒤가 없다는 태도로 강력한 무역 분쟁을 걸어오고 있다. 중국의 금융 시장을 외국에 개방하면 안 된다는 건 알겠는데, 현실적으로 그 방법을 어떻게 가져가야 하는지 정도는 제안해야 ‘전략’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리고 두 번째 문제, 저자는 정부 주도의 강력한 경제 체제를 끝까지 유지해야 한다고 했다. 이 내용이야말로 경제학 서적에서 내놓을 수 있는 가장 황당한 해답이 될 것 같다. ‘정부 주도의 경제’라니? 물론 학파에 따라서는 정부 주도의 경제 성장론을 타당하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전략을 수행하는 주체가 누구냐 하는 것이다. 중국 정부? 전 세계인이 가지고 있는 중국 공산당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은 무슨 수로 해결하고?
공산당의 통제가 중국 내에서나 먹히지 당장 바로 옆에 있는 한국에서도 콧방귀만 뀌는 실정이고 중국 IT 기업 중 어느 하나도 한반도에 제대로 자리를 잡은 곳이 없다. 꽌시라는 이름의 부정부패가 만연하기로 소문난 그런 집단이 주도하는 경제 체제가, 아무리 달러가 불안정하기로서니 신뢰도에서 미국의 기축통화를 넘어설 것이다? 이 정도면 논리적 비약을 넘어 궤변이라고 부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