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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딩 Aug 30. 2024

그는 왜 그랬어야 했나 <죄와 벌>(도스토예프스키)

내 안의 선을 끝까지 믿어주는 사람의 존재가 구원이다

 1860년 후반 상뜨페테르부르크. 가난한 법학도 청년이 고리대금업을 하는 노파를 도끼로 살해하고 금품을 훔친다. 이 살인자는 ‘죄와 벌’의 주인공 로지온 로마노비치 라스콜니코프. 살인의 동기는 원한이나 돈 따위가 아니었다. 도대체 왜?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사회에 무익한 이(蝨)를 자신의 원칙과 양심에 따라 처단했을 뿐이라 말하는 주인공. 그는 인간을 범인(凡人)과 비범인(非凡人)으로 나누고, 비범한 자는 법과 관습을 초월하여 장애를 제거(살인)할 권리를 지닌다고 믿는다. 그는 이것을 ‘넘어서다’라고 표현한다. 노파를 죽인 것은 자신이 비범한 존재임을 스스로에게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라스콜니코프는 어쩌다 이리도 극단적이고 광기 어린 사상의 노예가 되었을까. 비범한 두뇌, 염세적 가치관, 극단적인 성격, 선민의식, 가난으로 인해 패대기 쳐진 자존심, 사회에 대한 분노... 많은 것들이 배경이 되겠지만 그 외에도 한 가지가 더 있다. 그를 심문한 예심판사 포르피리의 언어를 빌리자면 ‘공기’다. 그를 사회로부터 고립시켰던 달팽이집 같은 골방, 그 골방을 장악했던 공기. 그것은 도의성이 무시된 이성과 긴 시간 그가 뱉어낸 냉소와 분노가 뭉쳐진 공기였다. 그 공기가 그에게 광기를 불어넣었다. 뇌에 똬리 튼 광기는 숙주를 몰아내고 그의 사상 전체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마침내 폭주하기 시작한다.



그는 처음부터 ‘악’의 속성을 갖고 태어난 걸까?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그에겐 ‘선’의 속성도 작게나마 있었다는 점이다. 낯선 이에게 선뜻 가진 모든 돈을 내놓는다거나, 훔친 돈을 쓸 생각조차 못하는 점, 자기를 위해 희생하는 가족에게 가시 돋친 말을 뱉으면서도 그들에 대한 죄책감을 버리지 못한 점 등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나 그는 자기 안의 ‘선’을 발견할 때마다 그것을 ‘범인(凡人)의 표식’쯤으로 여겨 기겁을 하고 그런 생각을 몰아낸다. 그는 자학과 발작을 오간다. 이성의 광기가 인간을 어디까지 몰아갈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굵은 눈물방울이 그녀(여동생 두냐)의 뺨을 따라 흘러내렸다. “우는구나, 두냐, 그럼 나에게 손을 내밀어 줄 수도 있을까?” “그걸 말이라고 해?” 그녀는 그(라스콜니코프)를 꼭 껴안았다. “고통받으러 간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죄의 절반은 씻는 셈이 아닐까?” 그녀는 이렇게 외치며 그를 꼭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죄라고? 무슨 죄?” 갑자기 그가 어떤 느닷없는 광분에 휩싸이며 소리쳤다. “저 추잡하고 해로운 이를, 가난한 자들의 피를 쪽쪽 빨아먹는, 아무에게도 필요 없는 전당포 노파를 죽였으니 마은 가지 죄악은 용서받을 텐데, 그것이 죄라고? 나는 그것을 죄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 죄를 씻을 생각도 없어.”(2권 p442)



그는 살인을 저지른 후 자신의 예상을 훨씬 웃도는 죄책감, 공포, 자괴감과 마주한다. 가장 그를 괴롭힌 것은 망상과 실제 자신 사이의 간극이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장애물에 대처하는 인간은 두 종류다. 감히 장애물을 뛰어넘을 생각조차 못하는 자와 가뿐하게 장애물을 뛰어넘어 전진하는 자. 자신은 후자여야 했다. 그는 살인을 통해 자신이 '넘어설 수 있는 존재'임을 걸 증명하려 했다.  하나 그는 장애물을 뛰어넘으려다 그것에 걸려 넘어진 자였다. ‘넘어서는 행위’는 순간이나 그것을 감당하는 것은 평생이다. 그는 충동적으로 법을 넘어섰으나 그것에 초연할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자신이 오만한 범인(凡人)에 불과했음을 인정한다.



'노파는 아무것도 아니야!(중략) 나는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다, 원칙을 죽인 것이다! 원칙은 죽였지만 정작 넘어서는 건 아예 넘어서질 못하고 이편에 남게 됐다.(중략) 나 역시 한 번뿐인 삶을 살고 있고, 나 역시 살고 싶단 말이다... 에잇, 나란 놈은 미학적인 이(蝨)에 불과할 뿐,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1권 p496)




  라스콜니코프는 살인 이후, 정신적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해 누군가에게 죄를 고백하려 한다. 자신의 ‘죄’를 고백할 상대로 고른 사람은 거리의 여인 소피야 세묘노브나 마르멜라도바(소냐)이다. 소냐는 술주정뱅이 아버지와 자신을 못살게 구는 의붓어머니, 배다른 동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창녀가 되었으나, 끝까지 '선함'과 '신앙'을 잃지 않는 인물이다. 라스콜니코프는 이런 소냐를 '유로지브이'(성스러운 바보)라 비웃지만, 그녀에게 알 수 없는 끌림을 느낀다.


“왜, 대체 왜 이 여자에게 말해 버렸을까, 왜 모조리 털어놓은 걸까!”(2권 p255)
"알고 있으니까 말해 주겠다는 거야... 당신, 당신 한 사람에게만! 내가 당신을 선택했으니까. 용서를 구하러 오는 것이 아니야, 그냥 말해 주겠다는 거야. 나는 그 말을 할 상대로 오래전에 당신을 선택했어.(중략)" (2권 p101)

 

 왜 하필 그녀인가?

 라스콜니코프와 소냐는 사회규범에 반하는 일을 감행했다는 점에서 각각 ‘넘어선 자’이다.(라스콜니코프의 경우 살인, 소냐의 경우 매춘) 이들의 차이는 ‘벽을 넘은 동기’에 있다. 라스콜니코프는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고 자기 확신을 얻기 위해 살인을 저질렀다.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 벽을 넘은 자다. 이에 반해 소냐가 사회적 규범과 법을 넘은 것(매춘)은 가족의 생계 때문이다. 즉 소냐의 넘어섬은 자기희생이었다. 라스콜니코프에겐 (본인 기준의)‘이상적 자아’가, 소냐에겐 ‘종교적, 도덕적 신념’이 있었다. 이상과 실제 자신 간의 괴리로 인해 이들은 괴로워한다. 소냐가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음으로써 자괴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반면, 라스콜니코프는 그 무엇도 내려놓지 못하고 스스로를 끝없이 괴롭힌다.


“이따위 치욕과 천함이 당신(소냐)의 내부에서 어떻게 정반대 되는 다른 성스러운 감정들과 공존할 수 있는 거지? 차라리 곧장 물속에 몸을 던져 단번에 끝장을 내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것이 천배는 더 정의롭고 더 이성적이지 않을까 말이야!”(2권 p87)


‘왜 하필 그녀인가?’에 대한 해답이 여기 있다. 소냐는 ‘넘어선 자’이자 그것을 ‘초월한 자’였다. 그는 소냐에게 공범으로서의 연민과 동질감을, (자신이 끝내 실패한) ‘초월한 자’에 대한 존경을 동시에 느낀다. 그는 그래서, 소냐여야만 했다.



  작품의 말미에 라스콜니코프는 자수를, 배덕자 스비드리가일로프(두냐가 가정교사로 일했던 집의 바깥주인/쾌락주의자)는 자살을 택한다. 이 두 인물의 선택은 독자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던진다. '삶을 버릴 것인가 말 것인가'의 기로에서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상반된 선택을 하게 한 걸까. 스비드리가일로프에게는 소중한 것도 자신을 소중히 여겨주는 존재도 없었다. 자기 자신조차 그에겐 소중하지 않았다. 반면, 라스콜니코프의 삶에는 소중한 것들이 있었다. 오빠를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려 했던 여동생 두냐, 어떤 모습이든 끝까지 그를 사랑해 주는 어머니 풀헤리야, 구원의 희망 소냐.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 바로 자기 자신. 라스콜니코프는 자신을 나폴레옹과 동일시할 만큼 스스로의 가치를 높게 평가했던 인물이었다. 라스콜니코프가 차마 삶의 끈을 놓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이 사람들(삶에 남은 소중한 것들) 때문 아닐까. 


‘나는 참 못된 놈이야, 그런 줄은 나도 안다. 하지만 저들은 어쩌자고 나를 이렇게 사랑하는 걸까, 정말 그럴 가치가 없는 놈인데! 오, 만약 내가 혼자였다면,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고 나 역시 아무도 절대 사랑하지 않았다면! (2권 p448)
“엄마한테 솔직히 터놓고 할 얘기가 있어서 왔는데요, 설령 엄마가 불행해져도 어쨌거나 꼭 알아 두세요, 엄마의 아들은 지금 엄마를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하고, 또 엄마가 나에 대해 생각했던 모든 것, 즉 내가 매정한 자식이고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전부 사실이 아니에요. 나는 언제까지나 엄마를 사랑할 거예요... 이제 됐어요. 이렇게 해야 한다고, 이런 말부터 꺼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중략) 그는 어머니 앞에 쓰러져 그 발에 입을 맞추었고, 모자는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이번에는 어머니도 놀라워하지도, 이것저것 캐묻지도 않았다. 아들에게 뭔가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이제 어떤 무서운 순간이 닥쳐왔음을 벌써 오래전에 깨달은 탓이었다. “로쟈, 요 귀여운 것, 내 첫아이야.”(2권 p439)


  자수를 택한 라스콜니코프는 시베리아 유형살이 중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깊은 번뇌에 빠진다. 여전히 그를 지배하는 그 이론과 삶에 대한 허무는 끊임없이 그를 괴롭힌다. 마음의 평온, 나아가 구원을 위해선 그의 명제가 반증되어야 하는 걸까? 패러다임의 전환 없이 구원은 불가능한가? 도스토예프스키의 대답은 No다. 작가는 그에게 전혀 새로운 ‘공기’(포르피리가 강하게 역설했던 새로운 공기)를 불어넣음으로써, 이론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논의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린다. 그 새로운 공기는 사랑의 감정이다. 자신이 소냐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라스콜니코프는 눈물을 쏟으며 햇볕아래 진심으로 무릎을 꿇는다. 오랜 시간 그를 가두었던 이성의 골방에서 벗어나 인간적 감정으로 회귀하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 라스콜니코프는 비로소 구원의 희망을 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 자신도 알지 못했지만, 갑자기 뭔가가 그를 훌쩍 들어 올려 그녀의 발밑으로 내던진 것 같았다. 그는 울면서 그녀의 무릎을 끌어안았다.(중략) 그녀의 눈은 무한한 행복으로 빛났다. 그녀가 깨달은 사실,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란 그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 무한히 사랑한다는 것, 마침내 이 순간이 도래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둘 다 창백하고 여위었다. 하지만 병색이 완연한 이 창백한 얼굴에서 이미 새로워진 미래의 아침놀이, 새로운 삶을 향한 완전한 부활의 아침놀이 빛나고 있었다. 사랑이 그들을 부활시켰고, 한 사람의 마음이 다른 사람을 위해 무한한 생명의 원천이 되어 주었다.


지금은 의식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리라. 그는 오직 느낄 따름이었다. 변증법 대신 삶이 도래했고, 의식 속에서는 뭔가 완전히 다른 것이 생겨나야 했다. 지금도 그것(복음서)을 펴 보지 않았지만 머릿속에서는 한 가지 생각이 번득였다. ‘과연 그녀의 신념이 이제 나의 신념이 될 수는 없을까? 적어도 그녀의 감정, 그녀의 갈망이라도...’ (2권 p498)



  오만했던 그의 무릎을 꿇리고 죄를 고백하게 한 것,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고 자수하게 한 것, 삶의 허무에 빠진 그에게 구원의 실마리가 되어준 것. 모두 한 여자의 진심 어린 사랑과 연민이었다. 작가는 파괴된 인간성을 회복할 해답은 결국 ‘인간’ 안에 있다 말한다. 정도가 심하냐 덜하냐, 실행에 옮기느냐 아니냐의 차이일 뿐 누구나 한 번쯤은 광기에 사로잡힌다. 나를 위해 울어주는 사람, ‘내 안의 선’을 끝까지 믿어주는 사람, 나조차 견디기 힘든 ‘나의 가시’마저 품어주는 사람. 그런 사람의 존재가 구원이다. 그 존재가 그를, 나를, 우리를 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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