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쌓아 그리는 일

흐르는 대로 그리는 계절 캔버스

by 명태

눈 깜빡하니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또 한 번, 눈을 깜빡하면 새내기였던 대학교 1학년이 지나가고, 열심히 공부했던 2학년을 지나 이미 4학년을 넘어섰다. 정말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무언가를 하나라도 잡을 수 있을까? 많은 부분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흩어지고, 남는 건 손가락 마디에 끼어 아른대는 자국을 남긴다.


나에게 그 자국은 '그림 그리기'라는 작은 취미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교과서에 열성적으로 낙서하는 아이를 보며 똑같이 연필을 쥐고 교과서에 선 대신 면을 남기기 시작했다. 흥미에 따라 곧잘 움직였기에 만화책에 나오는 주인공들을 그리고, 친구 얼굴을 우스꽝스럽게 그리며 낄낄 웃었다.


중학생 때는 아빠를 그렇게나 괴롭혀서 아이패드를 선물로 받는 데 성공했다. "인터넷 강의 듣기"라는 건실한 목표는 금방 무너졌다. 그 사이에 유튜브가 비집고 들어왔고, 애플펜슬을 손에 끼우고 돌리며 공책을 대신해 훌륭한 그림판으로 삼았다.


처음에는 머리에 있는 것만 쏟아내었다. 좋아하는 웹툰의 캐릭터를 그리고, 지나가는 단풍의 색을 옮겨 비슷한 자연 풍경을 그려보고자 했지만, 결국 바쁜 일상에 묻혀 캔버스를 열어보는 일이 없어졌다. 아주 가끔, 정제되지 않은 감정을 선으로 엮고 3분 만에 알아볼 수 없는 난잡한 것들을 만들었다.


이것도 의미가 있는 건가?


빨강과 파랑을 교차한 보라색 선. 스케치는 완벽하지만 선을 딸 용기가 없는 그림. 의도를 망각한 꽃그림.


어느 순간 의미를 넣고 싶어졌다. 취미로 둔 그림 그리기에 '의미 넣기'라는 거창한 꼬리표를 달았다.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법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했다. 정말 막막한데, 그래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시간을 쌓아 올리는 일이니, 아주 조금의 의미라도 있었으면 했다.


확고한 실행력을 위해 이 '의미'라는 단어를 '목표'로 수정했다. 목표는 "아이패드 배경화면에 쓸 그림 그리기"로 결정했다. 어떤 사진이 아닌, 나의 손을 따라 그려진 선이 배경화면으로 쓰이면 의미도 충족될 거라 믿었다.


KakaoTalk_20260226_003405013.jpg 2024년 상반기

첫 작품은 날것에 가깝다. 태양을 안고 있는 산을 그리고 싶어서 움직인 손은 금방 첫 작품을 그려냈다. 그냥 구조물만 있는 건 어색하니 단발의 무언가를 그렸다. 뭔가 밋밋하니 당장 떠오르는 단어도 적는다. 친구, 휴식, 여행, 휴가, 꿈... 그리고 그 해의 연도를 달았다. 날것이지만 첫 작품이고, 막상 배경화면으로 두니 꽤 괜찮길래 마무리했다.


KakaoTalk_20260226_003415123.jpg 2024년 여름

살을 태워먹는 여름. 그 여름에 걸린 감기 때문에 꽤 고생했었다. 가운데 튜브에는 3학년 2학기를 적어놓았고, 막 베이커리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을 때라 빵도 그려 넣었다. 그냥 넣기엔 밋밋해서 그때의 코멘트도 달아두었다. "시간이 더 필요하다"라고. 잦은 실수 때문에 알바를 하러 갔던 날마다 심장을 졸였었다. 현장직에는 지독히도 안 맞는구나 싶었다. 3학년 1학기때부터 소모임장을 맡았는데, 2학기에는 문집을 내놓아야 했어서 어도비의 인디자인을 열심히 공부했던 기억이 난다. 여러모로 바쁘고 더웠던 여름이었다.


KakaoTalk_20260226_003424789.jpg 2024년 겨울

2024년 겨울을 기념해 그렸던 그림이다. 여름에 그렸던 그림이 질렸던 참이라 새로 그렸었다. 가운데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감명 깊게 봤던 애니메이션, 계속 들었던 음악, 했던 게임의 캐릭터를 그렸다. 오른쪽은 했던 프로젝트들, 먹었던 간식, 아르바이트 끝난 기념 후련한 "굿바이"를 적었다.


KakaoTalk_20260226_003438130.jpg 2025년 후반기

우여곡절 많았던 2025년, 일과 사람에 치여 사느라 2025년 상반기는 그냥 흘려보냈다. 6월은 되어서야 시간이 났다. 마찬가지로 했던 게임들과 했던 일들을 그려냈다. 사회복지실습은 종합사회복지관에서 진행했는데, 좋은 판단은 아니었다. 보람을 떠올리기 이전에 고생했던 일들이 덮쳐온다. 주중에는 복지실습, 주말에는 근로로 쉴 틈이 없었던 날들이었다.


KakaoTalk_20260226_003447006.jpg 2025년의 끝

사람 여럿을 잊고 용서해야 했으니, "forget and forgive"를 적어 넣었다. 애석하게도 이 다짐은 여태 지켜지지 않고 있다. 말 그대로 '다짐'뿐이었다. 기대했던 콘서트를 우상단에 그려 넣고, 했던 게임들을 생각해 보며 2025년을 회고했다. 바쁜 한 해였지만 많은 것을 하고 깨달았던, 아주 힘들었던 시간을 기억하기 위해 빨간색을 자주 썼다.


2026_spring.jpg 2026년 봄

그린 지 한 달이 안된 따끈한 그림이다. 올해 봄은 작년과 달리 제발 온화하기를 바라며 그렸다. 요소는 이전 그림들과 거의 비슷하다. 했던 게임, 봤던 애니메이션, 듣는 노래. 캔버스가 쌓일수록 항목은 변하지 않음을 느낀다.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무엇을 즐기고 있는지. 상승하는 퀄리티만큼이나 캔버스에 담기는 시간이 길어지고 당시의 생각도 정리된다.


나름의 의미를 찾게 된 것일까?


확실한 건, 앞으로도 계속 시간과 캔버스를 쌓아 올려야만 하는 목표가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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