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은 간이역에 장미꽃으로 피고

부산 여행수필 - 빗속에 두고 온 어린 왕자 이야기

by 어진


올해 마지막 기차여행. 한 해의 마지막은 언제나 탈것을 타고 어디론가 멀리 떠나는 그런 레퍼토리다. 한 해 전 마지막 날엔 밤비행기를 타고 멀리 스페인으로 떠났는데, 이번엔 밤 열차를 타고 부산엘 간다.

삼랑진역에 기차가 섰다. 언제였더라, 구월이었나. 부산에서 마산으로 갈 때 잠시 삼랑진역에 내린 적이 있었다. 그날도 오늘처럼 주룩주룩 밤비가 내렸다.



조그만 간이역에 어린 왕자를 두고 온 것 같았다. 혼자서 그는 무얼 하고 있을까. 이제 간이역은 과거가 되어버려 더 이상 기차가 다니지 않는다. '지금'으로 오는 열차나 '나중'으로 가는 열차도 없다. 지금쯤 그는 플랫폼 위에서 추적추적 비를 맞으며 자기의 그림자를 적시고 있을까.
기차를 타고 가다가 문득 스치는 간이역에서 정말로 그 어린 왕자가 플랫폼에 선 채 나와 눈이 마주친다면, 빛의 속도로 달리는 시간의 열차 속에 지금의 내가 앉아 있고 그리고 과거의 그 애와 등불이 스치듯 그렇게 마주한다면, 왠지 모르게 나는 무서워질 것 같다. 체크무늬 칼하트 셔츠를 길게 걸치고 역 앞 작은 카페에서 따뜻한 카페라떼와 데운 크림치즈 프레즐을 들고 있는 그 애를 본다면.


조그만 간이역에 어린 왕자를 두고 온 것 같았다.


'잠이 든 어린 왕자가 이렇게까지 나를 감동시키는 것은 이 애가 꽃 하나에 대해서 충실한 것과 잠을 자는 동안에도 등불의 불꽃처럼 충실한 것과 잠을 자는 동안에도 등불의 불꽃처럼 이 애 안에서 빛나고 있는 장미의 모습 때문이다.' 어린 왕자와 마주했던 한 붉은 비행사는 그를 이렇게 회상했다.
과거에 그 애에게 있었던 등불이 지금 나에게도 있을까. 과거의 그 애에게 한 송이의 꽃이었던 무언가. 어린 왕자는 꽃을 언제 떠나 왔을까. 지금 나는 그 꽃으로부터, 꽃과 내가 살던 별로부터 이미 멀리 떠나와 점등인의 별에서 다른 여행을 떠나고 있다. 나는 언제쯤 그 꽃에게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어쩌면 꽃은 내 마음속에선 이미 죽어버렸는지도 모른다.




밤기차엔 사람이 듬성듬성하다. 기차는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어린 왕자의 작은 별에선 열차는 그 자신의 꼬리를 향해 달려가겠지. 출발역도 도착역도 없이 영원히.


매거진의 이전글삼호선 밤비행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