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호선 밤비행기

하노이 여행수필 - 지하철 막차에 두고 온 것들을 생각하며

by 어진

오랜만에 비행기를 탔다. 기체가 뜨고, 모든 불이 꺼졌다. 금연 표시등과 주황색 독서 램프 몇 개가 명멸했다.

삼호선 막차가 생각났다. 오렌지색 항공사 로고와 듬성듬성 켜진 오렌지색 불빛들. 그리고 삼호선의 색깔 오렌지색.


어른이 되면서 유독 삼호선을 많이 탔다. 학교 가는 길에 지나치던 경복궁역. 버스 막차를 잡으러 향하던 을지로삼가역. 강북 버스가 끊기면 심야 버스를 타러 옥수역을 지나 불 꺼진 동호대교 건너 양재역. 친구의 자취방이 있던 홍제역. 그리고 새벽이면 종점이 되었던 독립문역.

양재역까지 갔다가 심야 버스마저 끊겨 독립문행 막차를 타고 서울을 거슬러 올라갈 땐 항상 궁금했다. 왜 새벽 삼호선 마지막 기차는 독립문에서 멈출까. 왜 이 막차를 탔는지 까닭을 알 수 없는, 남아 있는 마지막 한두 사람을 바라보며 괜한 궁금증에 빠진 적이 있었다.

아무도 답해주지 않는 것들을 궁금해할 때면 나는 독립문역에 내려 무(無)와 어둠을 태우고 가는 삼호선 열차를 홀로 서서 지켜보았고 저 열차는 어디로 가는가 쓸쓸함에 고개를 떨구었다.

삼호선 막차도 하노이행 밤비행기도 당장은 앞을 볼 수 없다.

지금 비행기를 타며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떠나보냈던 독립문행 막차는 비행기처럼 가는구나. ‘시타’를 태우고 「천공의 성 라퓨타」로 항해하는 거대한 밤의 비행선처럼 어디론가 힘을 주어 가는구나. 그 어디가 어디인지는 삼호선 막차도 하노이행 밤비행기도 당장은 앞을 볼 수 없다. 어둠. 비.

그 해 삼호선에서 찍었던 발자국들이 생각났다. 그리고 삼호선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일산신도시의 밤과 은평뉴타운의 안락함을 동경했고, 녹번역에 있을 누군가의 집을 상상했다. 그리고 녹번역에서 경복궁역까지는 환승역 없이 쭉, 사람도 없이 조용히 미끄러지듯이 나의 날들도 어떤 특별함 없이 사소하게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들었다. 그 여러 생각의 발자국들이 이젠 독립문행 막차에 실려 어둠과 함께 사라지는구나.


그렇지만 아직도 궁금한 것은 막차는 왜 승객을 독립문역까지밖에 태우지 않는 걸까? 왜 대화행 막차가 아니라 중간인 독립문역이 종점인 걸까? 하는 것이었다.

진짜 종착역인 대화역까지 가면서 기관사는 무슨 생각을 할까? 그 안에 있는 내 생각의 발자국들은 어둠 속에 실려 가면서 덜컹덜컹 흔들리면서 다 어떻게 되어 버렸을까? 하는 슬픈 물음들이 지하 철로 너머로 멀어져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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