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여행편지 3 - 아름다운 별들이 유영하는, 너 런던이여
런던 교외 북서부, Hampstead Heath의 밤하늘 위로 비행기가 지나가고 있어. 우리의 삶도 비행기와 같아서 모든 것을 시작할 때에는 아주 이른 아침에 상쾌한 동이 트듯 비행기도 힘차게 이륙한단다. 영종도의 동터 오르는 아침을 생각해 봐. 이제 우리의 삶은 이륙하는 순간부터 긴 항해를 시작하는 거야. 아주 기나긴 삶의 여행을 말이야.
삶이라는 비행기를 타고 항해하다 보면 많은 돌파구를 만나게 될 거야. 하지만 비행기 안에 있는 시간들이 얼마나 아늑하고, 고요함 속에 깊음이 있는 값진 시간인지 몰라. 누구는 비즈니스 석에서 출발하고 누구는 이코노미 석에서 출발하겠지.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비즈니스 석에 타든 이코노미 석에 타든 우리는 모두 같은 비행기를 타고 하나의 종착지를 향해 날아가고 있으니까 말이야. 비행의 결과는 모두 같고 모두 동일한 목적지를 향해 가는 거잖아. 그래서 이코노미 석에 타도 좋고 비즈니스 석에 타도 좋은 거야. 우리는 그렇게 우리의 먼 비행을, 기나긴 여행을 떠나게 될 거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페이지 속을 항해하는 테레자와 토마시의 밤비행기처럼 말이야.
내가 어린 왕자였던 시절에(우리 모두는 어린 왕자였던 시절이 생에 한 번쯤은 있어. 모자처럼 생긴 그림을 보고 코끼리를 삼킨 보아 뱀이라고 한 번에 알아차릴 수 있던 시절이 말이야) 태평양의 이름 모를 섬을 향해(그건 마치 어린 왕자의 별이었을지도 몰라) 어린 구름을 헤치고 파도처럼 항해하던 날의 밤비행이 생각나. 비행기의 가장 긴 열에 동생들과 친구들과 노르웨이 숲 속의 텐트처럼 담요를 뒤집어쓰고 좌석 바닥에 길게 누워 쪽잠을 자던 기억이 문득 생각났어.
십 년도 넘었는데 그날의 비행이 또렷이 기억나. 옆에 앉았던 동생이랑 나는 노란 불빛 아래서 담요를 머리끝까지 덮고 무릎을 쪼그리고 앉아서 새근새근 잠을 잤어. 노란 불빛 아래서 텐트 앞에 모닥불을 피우듯 도란도란 이야기꽃도 피웠지. 어린 왕자의 별에 착륙하기까지 열다섯 시간의 비행은 불편한 새우잠과 함께 새벽우주 너머로 영원히 소멸돼 버렸는데, 십수 년 전의 아득한 비행이 어른이 되어 처음 여행을 떠나는 이 순간에 생각나는 것을 보니 참 슬프면서 아련해.
하지만 그때의 비행은, 어린 왕자였을 적 나의 비행은 아직 끝나지 않아서 여기 런던에서까지도 계속되고 있어. 사실 나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같은 자리에 앉아서 끝없는 비행을 하고 있는 거야. 그것이 나의 비행이고 나의 삶인 거지.
우리는 한없이 파랗고 말간 바다 위를 날아갈 거야. 김승옥의 「서울의 달빛 0장」에 나오는, 「설국」 같고 「닥터 지바고」 같이 하얗게 눈 덮인, 발자국 하나 없는 시베리아의 한없는 설원 위를 날아가겠지. 또 눈 덮인 몽블랑의 만년설 위를 날아갈 거야. 세상의 모든 밀실들이 자기 존재를 뽐내기도 하고 조용히 쉼을 얻기도 하면서 불빛을 반짝이는 대도시의 물결 위도 날아갈 거야. 그리고 아주 어두운 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 속을 날아가겠지. 비바람이 치고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 속을 말이야.
그리고 한밤중의 비행을 이어나가다 보면 별들을 만나게 될 거야. 아득한 주황색 불빛 속에 잠들어 있는 아늑한 우리의 비행기 좌석 하나하나가 다 별이겠지. 별. 우리의 비행기 전체도, 붉은 돼지 비행사가 잠시 눈을 붙이는 침대도 다 별일 거야. 이코노미 석 비즈니스 석 모든 사람들이 앉아있는 하나하나마다 그들이 잠들어 있는 꿈 하나 꿈 하나… 그런 것들이 모두 아늑한 저마다의 별이야. 아늑한 별들이 여러 개 모여 철새 떼처럼 끝없는 날갯짓을 이어가는 것처럼 우리가 비행하는 우주 위에도 별이 나타나오는 거지.
어떤 하늘은 어린 왕자의 우주여서 엄청나게 수많은 별무리들이 우리의 비행기 위로 막 쏟아지겠지. 깜깜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까슬까슬한 밤하늘 위에 별빛들이 폭포처럼 막 쏟아져. 까만 밤에 주황색 별들이 별똥별처럼 Hampstead Heath의 촘촘한 나뭇가지처럼 우리 사이로 막 쏟아지는 거야. 나의 비행기는 어쩔 줄 몰라서, 정말 아름답고 좋기도 하고 또 당황스럽기도 해서 위로 별을 뚫고 막 올라가. 별똥별들은 쏴아 끊임없이 내려오는데 우리는 역방향으로 전진하는 거지. 물살을 가르는 연어 떼처럼 위로 막 올라가. 아늑하고 아득한 밤하늘 위로…
얼마쯤 올라갔을까?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을 올라가도 이 별들의 무리는 멈출 줄을 몰라. 끝없이 이어지는 거지. 어떻게 몇 시간이 지나도 별무리의 흐름은, 그것도 우리랑 역방향으로 전진하는 별무리의 흐름은 없어지지 않는 걸까? 세상 우주에 있는 모든 별들의 개수를 다 합친다면 지금 우리가 맞고 있는 별의 천억 배는 될 거야. 그 모든 별들을 지나고 흘러 결국 비행기가 먹구름을 뚫듯 어느 순간 나의 비행기는 모든 별무리의 빛을 한 번에 팡 하고 뚫게 될 거야.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오듯이 지상에서 천국으로 올라오듯이 비상하는 거지.
이제 다시 밤하늘. 까맣지만 별들이 지나가서 약간 밝은 윤기가 번지는 우주가 쏴아 하고 내게로 안겨올 때 내 마음은 탁 트이고 자유로워지고… 비행기에 있던 사람들은 다시 대도시 창문의 불빛들처럼 아늑해지고 고요히 잠드는 거지.
원래 비행기 아래엔 별이 있을 수 없잖아? 그런데 파르르 떨리는 비행기 조종석 아래 밤하늘 밑을 내려다보니 수만의 별들이 우리 발가락 사이사이를 흐르고 있었어. 아름다운 황홀경이 은하수의 유리바다들처럼 떠 있는 거야. 그 별들 위를 항해할 때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마시고 감정의 정화를 느끼고 모든 짐이 날아가는 듯한 해방감과 모든 죄에서 자유로워지는 진리를 느꼈던 거지.
그런데 조종석 창을 입김으로 살며시 닦고 다시 밖을 보았더니, 글쎄 그 무한한 별들이 이 세상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사람들 한 명 한 명 자기만의 마음속이었던 거야. 자기만의 방과 밀실들의 불빛들이 모두 별이었던 거지. 무한한 창문들이 모여 은하수의 생명나무 줄기처럼 펼쳐지고 비행기 아래 수놓아져 있던 거야.
별들은 도시의 물결들, 인간의 스마트폰의 물결들, 자동차의 흐름들… 모든 것이었어. 아늑한 주홍빛 불 하나하나였고 유영하는 자동차의 전조등이었어. 그런 밤 속에서 혼자 이어폰을 끼고 자신만의 작은 화면 속 수정바다를 헤엄치는 사람들의 물결들이었지. 모든 물결과 마음과 밀실들이 섞여 혼합된 별들을 바라보면서 나의 비행기는 모든 것에 대해 탈출감을 느껴.
우리는 그런 별들을 뚫고 다시 인생이라는 먼 비행 여정을 떠나고 있어. 이 비행은 언제 끝날지 모르지. 우리가 죽을 때까지. 우리가 죽으면 이 비행도 끝나는 걸까? 아니야. 내가 죽는다 해도 이 비행은 끝나지 않아. 몸은 죽어도 나의 혼은 우주보다 더 깊은 곳, 우주보다 더 멀리 있는 나라에서 영원히 비행하겠지. 까만 밤하늘을 넘어서 셋째 하늘로 가는 영원한 비행. 그곳에서의 비행기, 그리고 비행기 속의 분위기는 얼마나 아늑하고 행복하고 꿈결 같을까. 비행기가 날아가고 있는 우주를 만든 존재가 우리를 구해준다면, 땅으로부터 해방시켜준다면 언제 어디서든 그런 비행을 하게 될 거야. 영원히.
나의 마음속의 공원 이야기를 하다가 여기까지 왔어. 그래, 나의 마음속 공원을 잘 키워 나가고 내 우주 속을 순항하고 있는 비행기도 잘 운항해나가는 것. 그건 다른 사람이 보기엔 이상한 모습일지 몰라도 아주 평화롭고 편안할 거야. 내가 보기에 마음에 들도록 공원을 가꾸고 다른 사람들까지 포용하고 태울 수 있는 비행기를 만들 때, 나의 공원과 비행기는 더 아름답고 자유로워지겠지.
오늘 밤도 수고 많았어. 내일 나를 기다리고 있는 또 다른 여행길 위의 나를 기다리면서 막을 내리기에는 아직 오후 네 시밖에 안 됐네. 섬나라 안개 도시는 겨울에 해가 빨리 진다지. 다시 도시로 돌아갈게 나는. 아름다운 별들이 총총히 유영하고 있는 도시로 말이야.
그 도시를 향해서 나는 갑니다. 안녕, 나의 공원, 나의 비행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