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여행편지 2 - 우리의 마음속엔 저마다의 공원이 있어
어진아, 너는 이렇게 낯선 땅에 와서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배우는구나. 영국에 머무르는 열흘이라는 시간 동안 나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어. 나란 누굴까. 내 마음속에도 Hyde Park처럼 이렇게 넓은 공원이 하나 있는 거야.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저마다의 공원이 하나씩 있지. 그리고 너는 지금 ‘어진’이라는 아이의 마음속에 있는 공원에 들어온 거야. 공원은 이렇게 한없이 넓어. 이제 이 공원은 나의 세상이겠지? 나의 과거도 있고, 복실이도 있고, 아빠와 엄마로 보이는 사람도 있어. 나의 세계야. 나의 공원. 지금 내가 서 있는 공원이 그동안 살았던 나의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어.
나의 공원은 지금 내가 살아가는 현재도 보여주고 있어. 그리고 앞으로 내가 만들어가야 할 미래의 나의 모습들도 보여주고 있지. 이 공원에는 나의 지금 모습과 과거의 아이였을 때의 나의 모습, 그리고 먼 훗날 중년이 되었을 때의 나의 모습들까지 있어. 또 내 모습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내 주변에 있던 사람들, 나와 같이 알고 지낸 소중한 사람들, 내가 지금까지 좋아했던 사람들, 싫어했던 사람들까지 모두 이 공원 안에 있는 거야. 나의 마음이라는 공원 안에 말이야.
지금은 나의 공원을 걷고 있어. 이렇게 아주 평화롭고 조금은 쓸쓸한 공원을 말이야. 나는 원래 내가 쓸쓸하다고 생각해. 그래서 내 마음속에 있는 공원도 지금처럼 이렇게 나뭇잎이 없고 다 시들고 마른 나뭇가지들만 있는 거야. 그런데 나는 이런 모습들이 좋아. 이렇게 쓸쓸하고 시들고, 조용한 모습이 좋아. 이건 나쁜 게 아니야. 그냥 사색할 수 있고 평화롭고, 혼자 조용하게 있을 수 있으니까. 난 이게 좋아.
이렇게 공원 안을 걷고 있으니까 아무 생각도 안 들고 좋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 이게 여행을 하면서 내가 생각하고 있는 모토야.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심호흡을 하듯이 그렇게 내 마음속에 있는 생각들을 내보내기도 하고, 여행지에서 만난 감상들을 받아들이기도 하면서 마음을 정리하는 거지. 저기 강아지 한 쌍이 있네. 귀여워. 강아지가 보이니? 강아지들이 사이좋게 다투고 있어. 참 좋은 모습들이지?
지금 내 공원이 벌써 어두워지고 있어. 내 공원에는 바람도 불고 비도 내리고, 이렇게 물웅덩이도 있고 구름도 있고, 하늘도 있어. 이제 낮에서 저녁으로 넘어가는 시간이 되었네. Blue Hour, 개와 늑대의 시간, 지금은 그런 시간이야.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 그걸 한자로는 모색(暮色)이라고 하잖아. 저물 모에 빛 색. 모색은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색깔이야.
공원에도 크기가 있잖아? 큰 공원도 있고 작은 공원도 있는 거야. 그런데 큰 공원이 좋다, 작은 공원이 좋다, 이런 건 없어. 큰 공원은 큰 공원대로 좋은 거고, 작은 공원은 작은 공원대로 운치가 있는 거야. 마음이 아주 넓으면서 많은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은 큰 공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야. 그리고 자기만의 세계와 공간이 확실히 있는 사람, 개성을 가지고 소수의 사람들과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은 작은 공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지.
내 공원은 지금까지는 조금 작고 아담했어. 나만의 감정과 생각과 글이 뚜렷한 공원이었지. 나는 작은 공원을 좋아하는데, 지금 보니까 이렇게 큰 공원도 꽤 좋은 것 같아. 많은 사람들이 머물 수 있는 큰 공원.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렇게 큰 공원에는 사람들이 많아도 많은 것 같지가 않아. 왜냐하면 사람들이 곳곳에 널리 흩어져 있으니까. 그리고 나무도 빼곡하니 많지만 공원이 워낙 크니까 띄엄띄엄 뻗어있고, 바글바글 복잡한 느낌이 안 들잖아. 그래서 이렇게 큰 공원도 좋은 것 같아. 무언가 포용해야 하는 것이 인생이라면, 큰 공원도 좋은 거라고 생각해.
지금은 나의 공원을 어떻게 가꾸어 나가야 할지 고민 중이야. 지금까지 내 마음속에 있는 공원에는 좋은 일도 많았고, 슬픈 일도 많았어. 쓸쓸한 일도 많았고, 고운 일도 많았지. 내 공원은 또 이렇게, 지금 내 발 앞에 있는 물웅덩이처럼 많이 파헤쳐졌어. 깊이 파이고, 상처도 받고, 슬프도록 아팠지. 그래서 이 아픈 공원을 어떻게 하면 위로해주고 치유해줄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더라구. 나 자신이 바로 공원이니까…
이렇게 웅숭깊은 공원 한가운데에 있으니까 너무 좋다. 도시의 소음이라고는 거의 없지. 들리지 않지. 새소리만 울려 퍼지는 숲이지. 서울에는 이런 데가 드물잖아. 있다 해도 접근성이 떨어져 쉬이 가지 못하는데, 이곳은 도심 한가운데에 있으니까, 인도 바로 옆에 공원이 있으니까…
참 좋은 것 같아. 이렇게 아름다운 공원을 볼 수 있다는 건 정말 좋은 일이야. 나의 공원.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고, 더 많은 것들을 느끼고 싶고, 더 혼자이고 싶고, 혼자서 더 홀로 서고 싶고, 더 외롭고 싶고, 더 쓸쓸하고 싶다. 그렇지만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도 싶어. 사실 영원히 홀로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거야.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친구들과 연인들, 그런 우정과 가족과 인연들과 함께 있기를 바라게 되지. 그런 것들이 있기 때문에 쓸쓸하고 외로운 것도 좋아하게 되는 거야. 사람은 언제나 한쪽만을 가지고는 살아갈 수 없는 것 같아.
문득 지나간 날들에 읽었던 소설들이 생각난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같은 책들. 내 마음속의 공원은 이런 소설 같은 공원이야. 말하자면 ‘노르웨이의 숲’인 거지. 주인공 이름이 뭐였더라… 주인공 이름이 ‘와타나베’였고, 다른 주인공은… ‘나오코’랑 ‘레이코’인가… 그 소설 참 좋았어. 그렇게 우리 인간은 누구나, 모두가 자기 마음속에 아픔과 상처를 가지고 있다는 거. 그리고 모두의 마음속에는 ‘죽음’이란 게 있는 거야. 죽음의 이미지, 죽음의 상념 같은 거. 인간은 참 그런 거 같아.
그리고 저기 도시의 불빛들, 막연한 등불들, 저런 걸 보면 문득 어느 밤에 만났던 시와 그림이 생각나. 김광섭의 시 「저녁에」 그리고 김환기의 그림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같은 것들. 저기 보이는 건물의 등불들은 모두 ‘방’이잖아. 이렇게 수많은 도시의 외로운 밤에서, 나의 방 하나쯤은 있어야 하는 것 같아. 희미한 도시에 밤이 있고, 방이 있고, 우리 모두가 자신만의 공간이 하나씩 있는데, 그중에 나의 방 하나는 필요한 것 같아.
내 마음속의 방. 그건 아마 '밀실'일 거야. 최인훈의 「광장」에서 그려지는 것처럼 우리 마음밭에는 광장과 밀실이라는 두 공간이 존재하는데, 둘 다 모두 필요해. 광장은 사람들이 서로 만나고,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표현하고, 서로 수많은 생각들을 공유하기 위해서 필요해. 그리고 밀실은 자기만의 포근한 시간을 갖고, 자신만의 특별하고 비밀스러운 공간을 갖기 위해 필요하지.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는 자기만의 방, 자기만의 우주 하나쯤은 있어야 하는 것 같아.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이런 시처럼 말이야.
우리는 도시 속에서 살아가. 닷새 동안 런던이라는 도시를 보면서, 계속 대도시의 중심부에만 있다가 오늘 처음 사람들이 부대끼며 사는 곳도 가보고 그랬는데… 도시라는 곳은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인 것 같아. 런던의 심장부에 있으면서, 수많은 방을 보았고, 수많은 창문을 보았고, 수많은 불빛들을 보았어. 사람의 마음이란 건 그토록 화려한 불빛 속에서도 그렇게 외로울 수 있나 봐.
한없는 도시의 불빛들, 자동차의 물결들, 사람들의 스마트폰의 물결들… 생각해보니, 한없는 도시의 불빛들과 자동차의 물결들, 그중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의 물결은 이십일 세기를 넘어서며 ‘스마트폰의 물결’이 되어 버렸네. 수많은 스마트폰의 물결들을 바라보면서, 사람이라는 존재는 참 외롭구나, 그런 마음이 들었어. 그런 도시의 모습이 김환기의 그림처럼 남는다는 게, 김환기의 그림 속 창문처럼 남는다는 게 이 시대의 우리 도시인의 숙명이구나, 하는 걸 느꼈고. 그건 어느 도시에서나 마찬가지일 거야. 런던이든 파리든, 서울이든 도쿄든.
여긴 어디일까. 공원을 떠나가기 싫은데, 내 발걸음은 떠나라고 재촉하네. 돌아가고 싶은데, 길이 없어. 내가 이렇게 내 마음 정리를 할 동안, 내 공원에 대해 이야기를 할 동안, 벌써 하늘은 밤이 되어서 깜깜해지려고 하고 있고, 나무들도 검은색 이불을 덮고 꿈나라로 야간 비행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고, 꽃들도 구름도 바람도 넓은 바다도 다 안식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아.
이렇게 자연의 섭리대로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어떠한 욕심도 부리지 않고, 어떠한 마음의 동요 없이, 마음의 불안과 근심이 없이 말이야. 앞으로 내가 살아가야 할 나날들은 얼마나 복잡하게 꼬인 미로 같을까. 그렇지만 사람은 생각하기 나름이라, 미로라 생각하면 미로지만 아니라고 생각하면 또 아니지. 미로를 풀면서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모르겠지만, 여기 Hyde Park를 산보하듯이 미로 속을 걷는다면, 그것 또한 나쁘지 않지. 그건 아마 공원을 걷는 느낌일 거야. 답을 찾지 못해도 좋아. 걷는다는 그 자체에 이미 우리 삶의 의미가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