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를 성장시키는 글쓰기

"어떤 책갈피라도 결코 이 종이를 떨어뜨리지 못할 거야"

by 어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 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중에서

중학교의 마지막 겨울 방학이던 어느 날, 낡은 서랍장에서 일기장 하나를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어머니가 재수 시절 쓰던 기록이었지요. 시 같은 문장으로 쓰인 어머니의 일기를 읽고, 십대의 끄트머리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한 소녀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비록 방황하며 글을 썼지만 지금은 누군가의 아내가 되어, 누군가의 어머니가 되어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사는 한 여인의 모습을 보며 글쓰기는 방황을 통해 인간을 성장시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스프링 노트 한 권과 만년필 한 자루는 언제나 저를 따라다녔습니다. 동시에 숙명처럼, 방황도 저를 따라다녔습니다. 아니, 제가 방황을 따라다녔습니다. 야자 시간에 창문을 열고 커튼 안에 들어가 공부하는 척하며 친구들 몰래 글을 썼습니다. 야자가 끝나면 집에 곧장 가지 않고 공원 벤치에 앉아 종잇조각에 글을 휘갈겼습니다. 자연스레 친구들과 멀어지고 생활 주기가 불규칙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시험 성적도 늘 같은 자리를 맴돌았지요.


육체적인 방황은 정신적인 방황으로 이어졌습니다. 사물 너머에 있는 본질을 파헤쳐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 정작 현실 속의 제 자신은 존재마저 파묻혀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끊임없이 느꼈습니다. 글을 쓰며 바라 왔던 저만의 세계가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어 항상 아쉬움과 불만이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러나 글쓰기로 인한 방황은 저로 하여금 그냥 지나칠 수 있었던 사소한 일상에도 작은 의미를 부여하고 관찰하는 힘과, 타인의 말을 다시 한번 곱씹어 생각하는 힘, 그리고 세상을 다른 각도로 삐딱하게 바라보는 힘을 길러주었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학창 시절 나아가야 할 방향을 바로 잡아주었지요. 어머니의 글쓰기가 그랬던 것처럼, 글쓰기는 저를 성장시킨 것이었습니다.


제 언어가 저를 표현하는 수단이기 이전에 타인과 소통하는 창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제 언어는 저의 바람과는 정반대입니다. 부모님과 교수님, 그리고 친구들은 제 글이 너무 난해하여 제가 글을 통해 어떤 의미를 전달하려는 건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혼자만의 세계에 도취하여 쓰는 글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이기적인 글인데, 그동안 이기적인 글만 줄곧 써 온 것이지요. 소통하는 글을 쓰겠습니다. 누가 읽어도 공감 가는 쉬운 글을 쓰겠습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이십대의 초반엔 날카로운 글자 조각들로 막힌 좁은 길에서 혼자 방황하지 않겠습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손잡고 그들의 길을 부드러운 글자들로 넓게 닦으며, 글 속에 다른 누군가의 삶이 녹아든 그런 글을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