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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진 Mar 07. 2021

복숭아씨 일곱 조각의 비밀

한국영화 다시쓰기 2 - 「살인의 추억」과 다방의 시인

 

 * 영화 살인의 추억 모티프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초가을이었고 늦태풍이었다. 논두렁 가까운 읍내에 비가 내렸다. 촌스러운 밤이었다. 다방 안에 남자가 들어갔다. 날카로운 펜을 품은 남자였다. 다방은 남자의 표정만큼 음침했다. 뻘건 커튼으로 문이 잠겨있어 속을 알 수 없는 다방이었다. 그가 보통학교 시절 때 우연히 보았던 종삼 홍등가 아리랑 다방 같기도 했지만,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땐 타락에 절은 젊은 여인이 아니라 세월이 흘러 그들이 늙어버린 어느 심술궂은 아주머니가 우산을 들고 반길 뿐이었다. 남자는 태연하게 커피를 시켰다. 프림에 설탕까지 넣은 싸구려 다방커피를.

  


 
 그는 화장실이 어디냐고 물었다. 가정집 주방 같이 생긴 곳을 통해 뒷골목으로 들어갔을 때, 그곳에서는 비에 절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화투를 치고 있었다. 낯선 자를 경계하듯 노려보는 눈빛을 기억하며 자리에 돌아왔을 때, 어느새 그의 앞에는 도자기 컵에 담긴 물 한 잔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다소곳한 다방 레지, 김승옥의 소설이 만들어낸 레지 같은 모습을 하고서 정렬하는 붉은 표면장력들이 컵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우리는 왜 사르트르처럼, 알베르 카뮈처럼 될 수 없을까.

 
 적게 담긴 다방커피 한잔을 마시며 남자는 김승옥의 소설 「차나 한 잔」을 떠올렸다. 뜨거운 커피를 마신 다음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는 언제나 의미심장했다. 쨍 짱 호로홉, 쨍 짱 호로홉. 남자는, 그리고 남자와 같은 시인들은 이 소리를 들으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그들의 입술이 모두 비에 젖고 있었다. 추르륵 추르륵, 사망자의 틈 속에 복숭아씨 일곱 조각 같은 더러운 입술들이 종이에 시 한 줄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

 


 
 우리는 왜 사르트르처럼, 알베르 카뮈처럼 될 수 없을까. 우리는 왜 앙드레 브르통처럼, 조르주 바티유처럼 될 수 없을까. 그들이 피웠던 담배꽁초의 재 한 줌만큼이라도 닮을 수 있다면, 그들이 내뿜는 담배연기로라도 되어 사라질 수 있다면. 하지만 우리의 다방은 파리 몽파르나스에 있는 르 셀렉트가 아니고 레 뒤 마고가 아니고 카페 드 플로르가 아니었다. 남자의 머릿속에 어렴풋한 추억으로 남아있는 기형도 시인과 김지하 시인은, 유하 시인과 이상 시인은 파리 카페에서 담배를 피우며 앉아있는 그들과 한 번이라도 이야기를 해본다면 창피해서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입속에 복숭아씨 일곱 조각을 잔뜩 물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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