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다시쓰기 1 -「변산」, 소설 「무진기행」을 만나다
내 고향은 폐항.
내 고향은 가난해서
보여줄 건 노을밖에 없네.
- 영화 「변산」 중에서
* 영화 「변산」과 소설 「무진기행」의 '고향' 모티프에 대한 단상입니다.
고향에 대한 오마주, 소설 「무진기행」의 오버랩, '안개'와 '노을'이라는 오브제의 대치. 고향은 그런 곳이었다. 어린 시절이 있던 곳인데 돌아가기는 싫은 곳. 기대를 안고 가는 곳엔 언제나 실망이 있었다.
영화의 '변산'이 그랬고 소설의 '무진'이 그랬다. 그리고 나의 두 고향 '양양'과 '서울'도 그랬다. 지우고 지워도 고향은 지울 수 없다. 노을을 흠뻑 맞으면 옷이 따뜻한 것처럼, 안개를 흠뻑 맞으면 안경이 촉촉해지는 것처럼. 자꾸 내 인생에 참견한다.
사투리가 남아있다는 것은 아직 고향의 냄새가 배어있다는 뜻이라는데, 나는 서울 사투리를 쓰지만 내 주민번호 뒷자리 두 번째 숫자는 강원도를 의미하는 3으로 남아있다. 아름다운 흔적은 남지 않고 객관적인 증거만 남은 것이다.
고향을 대하는 태도에서 영화 「변산」과 소설 「무진기행」은 작은 차이를 보인다. 그 한 끗 차이가 기승전 '고향'인지, 기승전 '서울'인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증오하고 갈등해도 결국엔 함께 술잔을 맞대며 화해한 고향 친구 '학수'와 '용대'의 관계처럼, 변산은 아무리 미워도 다시 돌아오게 되는 애증 관계의 고향이다. 따뜻하고 아련하다. 어릴 적 소꿉친구 '선미'와 함께라면 새롭지 않아도 익숙하고 아름다운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살 수 있을 것 같다. 어린 시절 그만의 왕국으로 개선장군처럼 다시 돌아온 것이다.
「무진기행」은 그 반대다. 서울 생활에 지친 몸을 휴식하러 내려간 고향 무진에서 주인공은 잠시 안식을 얻는 듯하다. 젊은 여인 '하인숙'과 사랑을 나누고, 고향 후배 '박'과 동질감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고향에서 그는 어린 시절 작은 방에서 자기의 삶을 회피하며 고통받던 자신의 모습을 목격한다. 어린 그가 구축했던 그만의 왕국은 다시 들어가기조차 싫은 트라우마의 성벽이었던 것이다.
안개는 무언가를 자꾸 숨긴다. 차갑고 축축하다. 끈적끈적하고 습하다. 쓸쓸하고 기분이 좋지 않다. 한편 노을은 끝까지 보여준다. 벌거벗는다. 보기 싫어도 보게 되지만 아름다운 봄(seeing)이다. 노을은 슬프지만 안개처럼 불쾌하지는 않다. 슬프지만 아름답다. '슬플 때면 누구나 해가 지는 것을 사랑하게 된다는' 어린 왕자 같은 느낌이다.
다시 돌아간 고향에서 마주한 것이 안개인지 노을인지를 가지고 고향의 한 끗 차이를 설명한다는 건 조금 비약이지만, 그것들이 지닌 속성에 솔직하게 비추어 보면 맞는 말 같기도 하다.
사실 나의 시골 고향이 그렇게 슬프지는 않다. 어린 시절 뇌 속 어디를 찾아보아도 양양은 아름다운 기억뿐이다. 엄마는 늦게 오고 아빠는 일하느라 바쁘고, 모두가 하원한 어린이집에서 나만 혼자 저녁까지 남아 유년의 윗목에 누워 쓸쓸히 눈물을 훔치던 기억이 나긴 하지만 그건 지금 나의 삶에 그렇게 크게 작용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혼자가 되어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던 서울 고향에서의 기억이 더 나에겐 트라우마다. 그러면 나에게 '노을이었던 고향'은 양양이고, '안개였던 고향'은 서울이라고 하는 게 좋겠다. 내 고향은 두 개였으니까.
하지만 어른이 되어가며 나는 왜 그렇게 아름답던 노을인 양양이 아니라, 쓸쓸하던 안개인 서울로의 회귀를 갈망하게 되는 것일까. 양양을 떠나고 서울을 떠나 경기도에 정착하면서 언제나 서울을 동경했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고 싶었고, 서울에 있는 군부대에서 복무하고 싶었고, 서울에서 평생을 살고 싶었다. 많은 바람이 정말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더 갈망하면 할수록 서울은 점점 더럽고 추잡한 민낯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계속 그 불쾌한 서울을 갖고 싶었던 걸까. 어린 시절을 보냈던 두 번째 고향이라서 그랬을까. 서울도 고향이라, 고향으로 돌아가는 건 맞는데 다시 「무진기행」의 주인공처럼 될까 나도 내가 두렵다.
연어는 자기가 태어난 강으로 돌아간다. 가서 죽는다. 고향에서 죽지 않으면 차갑고 먼 바닷속 타향에서라도 죽게 된다. 연어의 삶을 보며, 그리고 식탁 위에 올려진 연어의 눈을 보며 우리는 어떤 고향에서 죽을 것인지, 가치 있는 죽음이란 무엇인지를 배우기도 한다. 하지만 연어처럼 시골인 고향과 서울인 고향, 꼭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연어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안개'처럼 가볍고 '노을'처럼 진하게, 두 하늘 사이에서 둘 다 바라보고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게, 연어처럼 안개 속과 노을 속을 모두 헤엄치는 삶을 산다면, 어디를 선택해도 쉽게 쓰러지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