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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ompebble May 19. 2017

나는 어린이책 편집자이자 페미니스트다.

<여성+어린이+문학> 집담회를 다녀와서


5일 전인 지난 주 일요일, 5월 14일에 <여성+어린이+문학> 집담회가 있었다. 집담회는 저녁 7시 가톨릭청년회관의 작은 소모임방에서 열렸다. 가톨릭청년회관은 마포구 홍대역 인근이었고, 시간도 늦은 저녁이었기 때문에 나는 집담회에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을 했다. 주5일 나인투씩스 출근하는 직장인인 데다 항시 불면의 두려움을 갖고 사는 내게 일요일 저녁이라는 시간은 충분한 숙면을 위해 모든 조건을 통제해야 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성과 어린이와 문학의 조합이라니. 어떻게 내가 이 모임에 가지 않을 수 있을까? 가까운 친구에게 집담회의 포스터를 보여줬을 때 친구는 "엄이 안 가면 안 되는 곳이네" 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서 나는 더욱 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책을 만드는 편집자다. 이 문장을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은 늘 마음 어디에선가 겸연쩍고 두려운 일이었다. 편집자라는 직업이 한국에서 사회적으로 열악한 대우를 받는다는 사실, 편집자는 실로 오만가지 잡무를 해야 하는 3D 직종이라는 사실, 깊은 사고를 요하는 지적 노동을 하고 있는 건지 종이에 글자를 얹히는 일만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건지 분간이 안 될 지경에 자주 오른다는 사실 등등이 나를 '편집자'로 소개하길 주저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제 조금씩 말해보려고 한다. 작게는 이 블로그 공간에서부터, 조금씩 범위를 확장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저는 책을 만드는 편집자예요"라고 말해보려고 한다. 편집자를 꿈꾸지 않았던 과거부터 편집자로 살지 않을 수도 있는 미래의 가능성까지 앞서서 설명할 필요는 없다. 나는 '지금 현재' 편집자로 살고 있을 뿐이다.


나는 어린이책을 만드는 편집자다. 어린이책 편집자로 산 지 어느새 2년 10개월이 지났다. 하지만 '어린이책을 만드는 편집자'는 '책을 만드는 편집자'보다 나에게 더 껄끄러운 정체성이다. 나는 성인의 언어를 사랑하며 성인(나와 친구들)이 살아가는 세계를 어린이가 살아가는 세계보다 (아마도) 더 사랑하고 염려하기에. 그렇다면 어린이책을 만들게 된 계기? 각박한 현실의 취준생들에게 어떤 분야의 책을 만들고 싶다는 꿈은 별로 의미가 없다. 출판사를 다니는 많은 친구들이 그렇듯이 나는 대학을 졸업하던 시기에 '활자의 아름다움'에 홀딱 빠졌고, '활자들이 일관된 목차와 내용으로 정갈하게 묶여 있는 <책>의 형태를 만드는 데 일조하고 싶다'는 열망으로 편집자를 준비했다. 그렇게 출판사 취직을 준비하다가 어린이책을 만드는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고, 어린이 만화로 시작하여 지금은 어린이 그림책을 만들고 있다. 아이를 키울 생각도 없고, 아이의 정신세계에 관심이 없고, 아이를 위한 책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더더욱 하지 않았던 나지만, 어린이책을 만들게 되었으니 어린이책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어린이의 언어란 무엇인지, 성인의 언어와 어떻게 다른지, 어린이의 사고력은 어디까지인지, 아니 내가 그걸 제한할 수 있는지, 어린이가 읽을 그림책과 성인이 읽을 그림책을 무 자르듯 나눌 수 있는지, 어린이가 알아서는 안 될 위험한 주제라는 게 정녕 있는 건지, 통념상 있다 쳐도 내가 그에 따라야 하는지, 어린이가 건강하게 자라기 위한 책이란 어때야 하는지. 무수한 질문들이 왔다 갔다. 질문이 생긴다는 건 일을 하기 위한 용도이든 생리적인 호기심이든, 관심이 간다는 뜻이었다. 그림책을 하나씩 편집하고 출간할 때마다 떠오르는 질문이 너무 많았지만 회사에서 내 질문들에 답해줄 선배들이나 동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각잡고 이야기 나눌 시간조차 없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어린이책을 둘러싼 문단과 출판계에 특정한 기류와 분위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어딘가 순수(pure)해야 하고, 밝아야 하고, 천진난만해야 하고, 추잡함이나 더러움 따윈 허용되지 않는……. 어린이책에 무겁고 어둡고 폭력적인 주제를 담는 것을 필요 이상으로 조심스러하는 출판계의 분위기는 물론, 어린이책 작가들은 성인책 작가들에 비해 마음이 따뜻하고 순수하다(?)는 근거 없는 풍문까지 있었다. 입사했을 때부터 그 분위기가 왠지 마음에 걸렸다. 책을 출간하면서 회사가 원하는 방식의 보도자료를 쓸 때마다 마음 한켠을 쿡쿡 찌르는 듯한 불편함이 사라지질 않았다(지금도 그렇다). 정규교육과정을 차례대로 밟으며 알아가야 할 지식의 정도와 단계까지 부정할 순 없지만, 어린이와 청소년도 응당 알아야 할 사회의 어둡고 그늘진 이슈까지 가려버린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예컨대 남성과 여성의 권력 차이에서 오는 젠더폭력부터 이혼, 죽음, 왕따, 범죄, 동성애자, 장애인 등등의 주제를 담은 책들은 -시중에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수요도 공급도 미미한 수준이다. 책에 담아야 할-담지 말아야 할 내용의 경계를 고려했을 때 어린이책이 성인책보다 편집에 있어서 훨씬 어려운 영역이 아닌가. 나는 어린이책을 계속 만들 수 있을까? 나는 어린이책 편집자로서 적합하지 않은 사고관을 가진 게 아닐까? 나는 아이를 끔찍이 사랑하고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어 사고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데 일주일에 한번씩 유치원에 가서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줄 때 내 심장이 뛰고 얼굴이 벌겋게 물드는 걸 보면 나는 너희들을 생각보다 많이 염려하는 것 같아. 너희의 작은 손발과 눈코입을 보는 기분은 굉장히 근사하거든. '물고기'를 보여주었을 뿐인데 '고래와 불가사리'를 동시에 떠올리는 너희들을 좀 더 알고 싶거든. 아무래도 어린이책을 조금 더 만들어봐도 좋지 않을까? 이런 앞뒤 안맞는 생각들이 이어진다.


그러다 5월 14일에 열린 <여성+어린이+문학> 집담회에 가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강연의 형태이겠거니 하며 편한 마음으로 갔는데, 모임방의 작은 크기에 한 번 놀랐고, 들어가자마자 다양한 채소 이름이 적힌 둥그런 스티커들이 보여서 두 번 놀랐다. 닉네임을 골라야 한다고 해서 세 번 놀랐다. 그만 놀라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으며 이 분위기에 익숙해지자고 살짝 다짐했다. 마음에 드는 채소를 하나 골라서 자리에 앉았다. 작은 모임방은 이내 사람들로 그득 찼고 어느덧 옆사람과 꼭 붙어 앉아야 할 정도가 되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인자한 인상에 어딘가 무르익고 단단한 느낌을 주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스물 세 명의 사람들이 네모낳게 둘러앉아 오이, 브로콜리, 토마토, 미나리 등 채소 이름을 가슴에 붙인 채로 익명의 자기소개를 하며 집담회가 시작됐다. 어린이책 편집자, 작가, 평론가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집담회 주제는 "문단 내 성폭력. 어린이문학은 안녕한가요?" 였고 사람들은 최근에 강원도민일보에 실렸던 교수의 제자 성희롱 사건을 입에 올렸다. 나는 들어본 적 없었던 사건이었지만 집담회에 온 사람들은 대부분 그 사건을 알고 있는 듯했다. 가해지목인은 어린이 문단에서도 유명한 사람이라고 했다.


http://m.kado.net/?mod=news&act=articleView&idxno=844944


집담회는 1) 강원도민일보에 실린 성희롱 사건을 보고하고 동료(우리)들의 연대방법을 고민하는 것 2) 이 사건을 "아동청소년 문단 내 성폭력"으로 확장하여 이슈화하는 것을 목표로 진행됐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기소한 상황에서 피해자가 낸 용기의 대가를 피해자가 혼자 치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대목이 기억에 남는다. 이 사건은 단순히 교수와 제자 간 성폭력이 아니고, 문단 내 성폭력임을 언어화하자는 목표에도 모두가 동의했다. 그 목표 아래, 집담회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이 어린이 문단 내에서 자신이 겪었던 피해 사례를 공유했다. 트위터에서 작년 10월부터 시작됐던 해쉬태그 XX_내_성폭력 운동을 되짚어 본다. 이 운동은 왜 어린이 문단에 미치지 못했을까? 성인 문단보다 피해 사례가 적을지 몰라도, 사소한 언어폭력부터 술자리 내 성희롱까지 따져보면 이쪽 출판계에도 피해 사례가 얼마나 많을지는 어린이 문단에 속한 사람들 -양심이 있다면-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나는 어린이책을 만들며 했던 질문들을 자연스럽게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어린이 문단 내 성폭력 사례들이 지금껏 가려져 왔던 이유에, 어린이책에 지워진 "순수하고 깨끗한" 이미지도 한몫 하지 않았을까. 최대한 정치적이지 않아야 하고, 이념적이지 않아야 하고, 그저 밝고 착하고 순진한 세계만을 표방하는 어린이 문단의 분위기가 거꾸로 드러내야 마땅할 중요한 사실관계들을 알게 모르게 감추어버린 것은 아닐까. 집담회에서 어떤 채소가 이런 말을 했다. "돌이켜보면 나의 업무와 여성주의적 정체성을 분리하며 사는 데 익숙했다. 이 현실을 재고하고 태도를 바꾸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고. 나 또한 페미니스트로 살면서 회사에 출근하는 순간 그 정체성을 의도적으로 버리곤 했다. 정체성을 드러냈을 때 돌아오는 시선이 싫어서 그랬다. 상처받기 싫고 주목받기 싫어서 그랬다. 스물 세 명의 사람들은 "자신이 입을 다물었을 때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후배들에게 그대로 이어지는 현실"을 자주 언급했다. 미안하고 부끄럽다고 했다. 깊이 반성한다고 했다. 뒤이어 말을 얹지 않아도 그 모임이 얼마나 중요하고 뜻깊은 시간이었는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나는 '지금 현재' 어린이책 편집자로서 살고 있다. 그리고 나는 페미니스트다. 어린이책은 내게 복잡하고 어려운 과제인데, 그건 아마도 내가 페미니스트 때문인 것 같다. 페미니스트는 고통을 외면하지 않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는 세상의 어두운 면을 끄집어내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는 폭력과 존엄을 밀고 나갈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까지 확실히 답을 내렸다. 그러니 여성, 어린이, 문학을 조합한 이슈는 내가 앞서서 말하고 싶은 주제이며, 세 단어를 조합한 공간이란 내가 그 어느곳보다 달려가고 싶은 공간이다. 집담회에 다녀온 직후로, 앞으로 내가 어떤 어린이책을 혹은 어떤 책을 만들어나갈지는 나만의 질문이 아니게 되었다. 왠지 든든한 동료를 얻은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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