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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ompebble Jan 31. 2017

다가오는 것들(Things To Come)

여전히 잠을 뒤척이는 사람들을 위해

*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습니다.


프랑스 배우 이자벨 위페르(Isabelle Huppert)에 대해 궁금해지던 참에, 최근에 개봉했던 <다가오는 것들>을 봤다. 이자벨 위페르는 작년에 혼자 극장에서 봤던 <라우더 댄 밤즈>에서 죽은 엄마의 역할로 나왔는데 굉장히 인상깊었다. 그 영화에서는 짧게 나오긴 했지만 풍기는 분위기가 아주 묘했다. 표정이나 몸짓만으로 아주 슬펐던 기억이 난다. <다가오는 것들>에서는 영화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주연 ‘나탈리’로 분했다. 주연인 만큼 액션도 크고 대사도 많아서 전체적으로 활기를 띠는 캐릭터지만 <라우더 댄 밤즈>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 배우만의 작고 호리호리한 체구에서 나오는 슬픔, 애통함 같은 게 있다. 그런데 그게 나약하게 느껴지는 게 아니라 도리어 단단하게 다져진 내공처럼 느껴진다. <다가오는 것들>에서 맡은 역할은 철학 선생님이었는데 이자벨 위페르는 지혜로움과 현명함 따위의 가치들과도 썩 어울리는 배우다. 그러니까 지혜롭고, 단단하고, 현명하고, 당차고, 아름답고, 꿋꿋한… 하지만 동시에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슬픔이나 소외감, 외로움도 가득 안고 있는. 이런 분위기는 연출된다기보다, 이자벨 위페르의 몸 자체에 배어 있는 것만 같다. 그만큼 다큐멘터리처럼 자연스럽다.



그녀(나탈리)는 부족한 것 없이 살고 있었다. 영화에 정확히 나오지는 않지만 꽤나 높은 지위로 보이는 철학 교수의 남편. 따뜻한 햇빛이 비치는, 인문 분야의 책들이 커다란 책장 속 가지런히 꽂혀 있는 모던한 인테리어의 집. 여느 화목한 가정처럼 독립한 아이들을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하고 디저트로 딸기를 나누어 먹는 가족.


물론 불행도 있다. 다정하지 않은 남편과 불안장애를 앓는 나탈리의 엄마. 불행은 나탈리의 바닥을 스멀스멀 기어다니다가 불시에 수면 위로 올라온다(많은 자기 성장 영화가 그렇듯이 그 불행에는 뚜렷한 인과관계가 없다). 남편은 자신의 외도를 고백하고 나탈리의 엄마는 요양원에서 죽음을 맞는다. 영화는 이 모든 과정을 잔잔하게 보여준다. 남편은 “그녀(다른 여자)와 살 거야”라고 담담하게 말하고, 나탈리는 “평생 날 사랑할 줄 알았는데. 내가 등신이지!” 라고 말한다. 이게 끝이다. 그나마 농도 짙은 배경음악이 깔리며 나탈리의 초조함, 다급함을 보여주는 장면은 나탈리가 증세가 악화된 엄마에게 찾아가는 장면이다. 몇십 년 동안 남편의 고향집 정원을 꾸미고 돌봐주는 데 많은 애정과 시간을 쏟은 나탈리는 이제 남편과 헤어지면서 그 정원과도 이별해야 함을 받아들인다. 마지막으로 정원에 찾아간 나탈리는 엄마가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고 정원에 핀 꽃을 몇 송이 꺾어 손에 쥔 채로 엄마에게 달려간다. 모든 것은 나탈리에게 불시에, 무자비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온다. 나탈리가 할 수 있는 건, 그녀의 의지와 무관하게 벌어진 상황을 견디고 대처해 나가는 것뿐이다.



다른 한편 이 영화에서 비중 있게 조명되는 역할은 ‘파비엥’, 나탈리의 제자다. 굳이 표현하자면 나탈리는 ‘스탈린주의자’를 비꼬는 부르주아급 지식인, 파비엥은 언어와 행동을 일치시키려 노력하는 급진적 행동주의자다. 훤칠한 키와 준수한 외모에, 직접 글을 쓰고 책을 내는 대안 출판 공동체를 만들어 산속에서 자급자족하며 살고 있는 파비엥. 나탈리는 남편과 엄마를 떠나보내고 비로소 자유로움을 느끼며 파비엥의 공동체에서 몇일 머물지만, 파비엥과 친구들의 젊고 급진적인 공간에 또 다른 괴리를 느낀다. 나탈리는 이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걸까.


계속해서 나탈리에게 다가오는 것들. 나탈리가 집필한 총서는 매출고 하락을 이유로 출판사에서 절판되고, 파비엥에게 “사적인 영역의 실천만으로 만족하는 부르주아 지식인” 소리를 듣는다. 그렇게 꿋꿋이 지켜 왔던 신념이 일순간에 비참해지는 순간. 그런 순간들이 나탈리 주변을 맴돈다. 그런데 나탈리는 무너짐에 그치지 않고, 그 이상으로 파비앵의 세계(젊음과 급진성)를 시기했던 것 같다. 자기가 온전히 누릴 수 없는, 자신이 지나간, 그리고 적극적으로 버렸던 세계(나탈리는 원래 공산주의자였으나, 소련에 직접 갔다 오면서 스탈린주의를 혐오하게 된다)에 대한 후회 섞인 질투. 나탈리는 파비엥이 그의 애인과 물속에서 자유롭게 뛰어노는 장면을 길게 응시한다. 뒤이어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는 나탈리가 고양이를 껴안고 침대에서 혼자 흐느끼는 장면이 이어진다. 참 외롭고 쓸쓸한 컷이다.



그러나 나탈리는 그 모든 다가오는 슬픔, 소외, 상실, 외로움을 견딘다. 그리고 살아 낸다. 다시 말하지만 나탈리는 강하고 단단하고 아름다운 여자다. 크리스마스날 어두운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전남편에게 “왜 왔냐, 내가 애인이랑 있었으면 어쩔 뻔 했냐”고 핀잔을 주는 나탈리는 유머러스하고 당차다. 남편을 본체만체하며 딸과 사위, 아들과 함께 먹을 크리스마스 식사를 준비하는 나탈리, 만나는 여자가 고향집에 내려갔다는 남편에게 “크리스마스날 혼자라니 딱하네”라고 말할 줄 아는 나탈리는 여전히 매력적이다.



갓 태어난 손자를 위해 파비엥이 만든 철학 입문 총서(영화에서 언뜻 비추기로는, 문고본 형태의, 삽화가 곁들여진 어린이용 철학책으로 보인다)를 선물하는 나탈리. 이것이 나탈리가 택한 삶의 화해법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마지막 컷. 나탈리는 울음을 터트린 갓난아이 손자를 안고 노래를 불러 준다. “맑은 샘물가를 나 거닐다가/ 그 고운 물속에 내 몸을 담갔네/ 오래전 사랑했던 당신을 나는 잊지 않으리/ 오래전 사랑했던 당신을 나는 잊지 않으리” 나탈리는 손자를 안고 어쩔 수 없는 생의 파동을 느낀다.



우리 삶에 다가오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다가오는 것을 미리 준비할 수 없다. 아무리 철저히 무장하고 훈련해도, 다가오는 상대에 따라 잠깐 주저앉거나 처참히 무너지는 것, 둘 중 하나다. 정말이지 지리하고 고된 반복이다. 달콤한 행복이나 생의 환희를 느끼는 순간은 고통과 고통 사이에 드물게 박혀 있다. 그만큼 아주 찰나다. <데미안>의 도입부에서도 그런 말이 나온다. “밝은 울림과 크리스마스의 향기와 행복에 둘러싸인 천사가 되는 것이야말로 달콤하고도 좋은 일이었다. 오, 그런 시간과 날들은 얼마나 드물게만 찾아왔던가! 선량하고 천진스럽게 허용된 놀이를 하면서도 나는 누이들이 견디기 힘들어하는, 결국 싸움과 불행으로 끝날 정열과 과격함에 자주 휩싸이곤 했다.”


그럼에도 나탈리는, 우리는, 왜 이별을 받아들이고, 감내하고, 수영하고, 꽃을 준비하고, 고양이를 부르고, 학생을 가르치고, 껴안고, 노래할까?



“우리는 행복을 기대한다. 만일 행복이 안 온다면 희망은 지속되며 이 상태는 자체로서 충족된다. 그 근심에서 나온 일종의 쾌락은 현실을 보완하고 더 낫게 만들기도 한다. 원할 게 없는 자에게 화 있으랴, 그는 가진 것을 모두 잃는다. 원하던 것을 얻고 나면 덜 기쁜 법, 행복해지기 전까지만 행복할 뿐.”


영화 중 나탈리는 알랭의 『행복론』에 나오는 이 소절을 읊는다. 어쩌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게 이 소절에 담겨 있는지도 모르겠다. 조금 과장해서 도식화한다면, 고통을 겪는 상태 = 행복이 오지 않은 상태 = 희망을 지속하는 상태 = 그 자체로 행복한 상태라는 뜻인 것 같다.


우리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사소하거나 커다란 불행들이 다가와도, 그것들이 나의 육신과 마음을 무겁게 짓눌러도, 우리는 밤이 되면 눈을 감고 잠을 청한다. 잠에 들 수 있다는 것은 “그럼에도 기대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기대하는 것이 있어야 잠에 들 수 있다. 우리는 이 고통이 끝나기를 기대한다. 행복을 기대한다. 행복을 기대하는 것은 희망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별해도 꽃을 사고, 잃어도 노래하고, 외로워도 잠을 청한다. 무엇이라도 욕망하기 위해서, 무엇이라도 만나기 위해서. 내일의 고통이 뚜렷이 보이는데도 잠에 들 수 있는 대담함과 용기는 대체 얼마나 의미 있는 것일까. 할 수만 있다면, 쉬이 잠 못드는 사람들이 잠을 청하는 순간들을 한데 모아 조용히 바라보고 싶다. 나는 아직도 잠에 드는 게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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