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바라나시
불타는 장작 밖으로 무언가 삐죽이 나와 있다. 한 눈에 봐도 그것은 사람의 발이 분명한데, 까맣게 타들어간 그것은 오래지 않아 툭하고 힘없이 떨어진다. 행여나 방해될라 부러 멀리서 지켜보는데 ‘활활활’ 타오르는 죽음의 열기는 이곳도 피하기는 역부족인 듯싶다.
오늘 아침도 이웃의 곡소리로 하루를 시작했다. 긴 세월 병석에 누워계셨다는 그 집 어른이 막 신의 부름을 받은 터였다.
“파파, 파파-”
현실을 부정하는 갈고리 같은 울음, 창자를 쥐어짜는 짖음만이 고요한 바라나시의 아침을 지배한다. 그 집 앞은 이미 애도의 물결이 가득했다. 그리고 멀찍이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이는 나 같은 여행자들이다. 유족들의 들끓는 슬픔에 생면부지의 여행자들조차 절로 숙연해졌다. 서른 넘게 세상을 살면서 그래도 굴곡 없는 평온함의 일상이었는지라 죽음은 늘 별개라며 그렇게 치부하고 살았는데, 여기 당면한 죽음을 보니 생의 한 가운데 비로소 나는 죽음에 사로잡혀 있었다.
바라나시의 미로 같은 골목을 헤매다 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죽음’을 마주한다. 처음 그것을 접한 것은 바라나시의 시장 안쪽 골목 어느 라씨집 이었다. 그곳에서 마음 맞는 여행객을 만났고 그와의 수다에 한참 시간 가는 줄 몰랐었다. 대화는 즐거웠고 라씨는 달콤했다. 그릇의 바닥이 보일라치면 눈치껏 채워주는 주인의 서비스도 대단히 만족스러운 한때였다. 그때 문 밖으로 죽음이 지나갔다. 기분이 이상했다. 막 넘긴 라씨의 묵직함이 목구멍을 막고 달달함이 지나친 칼칼함은 불편했다. 단순히 무서울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기 보단 어딘지 꺼림칙했다. 그것을 속으로 삼키고선 부러 모른 척을 했다. 그 존재를 말하기엔 아직 내가 할 말이 너무 없다 여겨졌다.
두 번째는 골목 안 시장 구경을 나설 때다. 화려함은 지향하지 않는지라 장신구 따위 별 관심 없었는데 시장 안쪽 골목길 어귀에서 만난 작은 가판대에 눈길을 끄는 뱅글들이 즐비했다. 기껏해야 가로 세로 채 50(Cm)이 될까 한 작은 상자였다. 그 안에 뱅글들은 정신없이 흩어져 있었다. 그것은 이제껏 보아왔던 인도풍의 블링블링함과는 다른 단출함으로 눈길이 갔다. 그중에 유난히 맘에 드는 뱅글 하나를 집어 들고 한창 흥정에 열을 올리는데 멀리서 그 소리가 들려왔다.
‘람 람 샤따헤이’ - 라마신은 알고 계신다.
‘람 람 샤따헤이’ - 라마신은 알고 계신다.
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리니 골목 끝으로 화려한 꽃가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점점이 다가오는 죽음 앞에 가만히 길을 터주니 내 앞으로 그것이 ‘슥’하고 지나쳤다. 온몸의 잔털이 쭈뼛이 세워졌다. 무지(無知)의 두려움에 그것은 불결함으로 간주되니 죽음은 되도록 피하고 싶은 현실이다.
세 번째는 그만 길을 잃고 헤맬 때다. 이제 바라나시 미로도 어느 정도 익숙하다 싶었기에 하물며 손에는 그 흔한 지도조차 들려있지 않았다. 그럴 땐 무조건 강가를 향하라는 지인의 말이 떠올랐다. 얼추 방향을 가늠하고 발길을 서둘렀다. 한참을 걸었을까, 골목의 귀퉁이서 무심코 한 발을 내 딛는데 ‘람 람 샤따헤이’ 라마신은 알고 계셨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으로 동여진 시신은 흡사 미라를 연상케 했다. 주위로 알록달록 꽃장식이 화려하니 비좁은 길목 탓에 팔등으로 스친 것은 아무래도 흩날리는 꽃잎이었으리라. 이제 죽음은 어느 정도 일상이 된 듯 가벼운 묵념만 까딱인다. 그 뒤로도 네 번째, 다섯 번째……. 그곳에서 죽음의 행렬은 앞으로도 계속됐다.
이곳 마니까르니까 가트(Manikarnika Ghat)는 바라나시에서 가장 큰 화장터로 24시간 끊임없이 시체를 불태웠다. 불길은 거대했고 연기는 자욱하니 시체 타는 냄새는 주변으로 진동했다. 한쪽에선 반라의 일꾼들이 마른 장작을 쉴 새 없이 나르고 있었다. 타들어 가는 시체를 지켜보며 슬픔을 억누르는 무리의 엄숙함은 경건이라는 표현으론 부족했다.
여행객들은 호기심에 이곳을 왔다. 화장터라니, 듣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이곳을 굳이 왜 걸음 했냐 물으시면 호기심 이란 명분 외에 그 어떤 답을 할 수 있었을까?
시신은 생각보다 오래도록 타들어갔다. 사는 것도 힘겹지만 죽는 것도 참으로 만만치가 않아 뵌다. 스르륵 꺼져가는 불길 밖으로 무언가 삐죽했다. 그것은 시신의 발이 분명하니 장작 값이 만만찮은 이곳에서 타다 멈춘 시신은 그대로 갠지스에 보내진다. 제대로 죽는대도 돈이 드는 세상이다. 그저 한 줌의 완벽한 재가되기 위해 우리는 그토록 아등바등 세상을 살아야 하나보다. 생의 한 가운데 죽음을 생각한다. 언제고 갈 길이라지만 아직은 그 길이 멀게만 느껴진다.
바라나시 강가에 있노라면 유독 노인들이 눈에 띈다. 인도인이 삶보다 중요하게 여긴다는 죽음 앞에 그들은 삶의 마지막 이곳 바라나시를 찾았다. 인생의 성스런 마감을 위해 강가에 머무는 사람들, 그들은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거리의 개들은 무기력했다. 몸집은 왜소하고 눈은 총기를 잃었으며 피부는 짓무르고 여기저기 두드러기가 산재했다. 먹이를 찾는다는 의지조차 상실한 채 어슬렁 걷는 걸음에는 영혼조차 없어 뵀다. 존재의 가치를 내버린 생명은 어딜 가나 무시만이 대접이라는 듯, 바라나시 거리의 개들에게 죽음은 어찌 보면 고단한 삶의 끝에 신이 내린 축복과도 같다.
밤이 깊어 어둠이 찾아오면 바라나시 보트들은 오늘도 어김없이 어둠의 갠지스를 유유히 흘러간다. 물결 따라 가는 길, 눈앞으로 찬란한 불빛이 가득하다. 다샤스와메드(Dashashwamedh Ghat)는 바라나시에서 가장 큰 메인가트다. 매일 밤 성대한 힌두교 의식(뿌자)이 행해지는 이곳에서 잠시 멈춰 의식의 화려함을 훔쳐본다. 누군가는 그곳에서 디아(Dia)를 팔아 삶을 연명하고, 디아(Dia)의 불꽃은 사람들의 마음을 담아 어두운 강가를 찬찬히 흘러간다.
갠지스를 가르는 사공의 노가 불현듯 멈춰 섰다. 그 질척거림을 기어이 눈으로 확인하고 그것이 타다 남은 시신의 일부임을 알아버렸을 때, 나는 여전히 죽음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나를 본다.
생의 한가운데에 우리는 죽음에 사로잡혀 있다.
바라나시 VARANASI
인도 최고의 힌두교 성지. 갠지스 강 연안에 위치하며 연평균 100만에 달하는 순례자가 모여들어 갠지스 강에서 목욕재계를 한다. ‘바라나시를 보지 않았다면 인도를 본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 그렇게 인도의 모든 것을 대변하며 3000여 년의 긴 세월에 ‘역사보다, 전통보다, 전설보다 오래된 도시(미국 대문호 마크 트웨인)’ 바라나시를 완성했다. 인도인들이 그들의 어머니라 칭하는 강가(갠지스)를 품은 고도(古都), 쉬바신을 비롯한 인도의 모든 신앙이 모인 신들의 고향, 신화가 현실이 되어 인도의 정신이 살아 숨 쉬는 그곳에서 갠지스는 오늘도 세속의 모든 더러움을 품고 바라나시 그곳을 유유히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