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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언 Jul 29. 2020

인도에서 평생의 꿈을 찾아오다

SRT 매거진 3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인도에 가면 죽을지도 몰라." 친구들의 장난 섞인 걱정을 뒤로하고 인도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샀다. 남자 친구인 지태가 함께 가지 않았다면 인도에 가보고 싶은 마음을 접었을지도 모르겠다. 그저 건강하게 돌아오기만 하자고 생각했는데 여행이 끝나고 보니 인도에서 얻은 게 꽤 많다.


갠지스강에서 전통의상 펀자브를 입고


콜카타 공항에 도착하니 온통 다르게 생긴 사람들뿐이다. 까만 피부에 동그랗고 큰 눈 때문에 하얀 눈동자만 허공에 동동 떠다니는 것 같다. 부담스러운 눈빛들이 우리가 가는 길을 따라다닌다. 짐 검사를 하려고 줄을 서 있는데 앞에 있던 인도 사람은 세 번이나 뒤돌아서 우리 얼굴을 쳐다봤다. 처음엔 기분 나빠서 눈싸움하듯 똑같이 쳐다봤는데 인도에 사는 친구가 말해줬다. 외국인이 신기하고 궁금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것뿐이란다. 인도에 온 것을 후회한 날도 있다. 숙소로 돌아올 때 깜빡하고 물을 안 사 왔는데 밤 10시 이후엔 숙소에서 나가지 말라는 말에 밤새도록 마른침만 삼켰다. 인도에 왔다는 긴장이 조금 풀리자 사람 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낮에는 시내를 구경하고 해가 지면 숙소로 돌아와 그림을 그렸다. 와이파이도 느리고 딱히 할 것도 없어서 매일 그림만 그렸더니 가져온 스케치북을 금방 다 써버렸다. 노트를 사려고 시내를 한 시간 넘게 돌아다녔는데 340원짜리 먼지 쌓인 종합장밖에 못 구했다. 어쩌면 먹고사는 게 고달픈 인도에서 그림은 사치일지도 모르겠다.


세계 여행을 우리만의 방법으로 기록하기 위해 시작한 어반 스케치(여행지나 일상을 주제로 현장에 나가서 그리는 그림)에 진정한 재미를 붙인 것은 인도다. 길목에 서서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기웃기웃 한참을 보고 갔다. 맨발로 골목을 누비던 아이들은 우리가 그림 그리는 모습이 마치 대단한 광경인 양 동네 친구들까지 데려와 말을 걸었다.


"그림은 얼마나 배웠어? 너무 잘 그린다, 지금 어디 그리고 있는 거야?"


가끔은 지나가는 소도 우리 그림을 보려고 찾아왔다. 저리 가라고 밀어내도 통 떠나지 않는 탓에 애를 먹기도 했다. 두세 사람 지나가기도 좁은 골목에 소는 어찌나 많은지 이런 모습을 보고 있자면 인도는 지구에서 1광년쯤 떨어진 다른 행성 같다. 사람들은 펌프로 물을 길어 사용하고, 멧돼지는 떼를 지어 찻길을 건넌다. 시장에는 동네 주민처럼 카디건을 걸친 염소가 산책을 하고, 지붕 위는 호시탐탐 감자를 훔쳐 달아나는 원숭이와 감자를 지키려는 주인이 눈치싸움을 하고 있다. 6차선 도로 위에 말을 탄 사내가 자동차와 줄지어 힘껏 달리고 있는데도 왜인지 이상하지가 않다.


지태의 그림을 구경하러 온 소 / 언언의 타지마할


비장한 각오까지 하며 인도에 왔는데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었다. 왜 인도에는 대형 백화점과 유명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이 없다고 생각했을까. 왜 인도 사람은 모두 사기꾼이라는 말을 무작정 믿었을까. 인도에 대한 무지와 편견이 많이 깨졌다. 게다가 기대도 하지 않았던 평생의 꿈까지 발견했다. 바로 일러스트레이터다. 내 이름, 가언처럼 '아름다운 말씀'이란 뜻을 가진 작가명도 만들었다. 내가 힘들 때 누군가의 위로와 응원으로 절망을 털고 일어난 것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아름다운 말이 되어주고 싶다. 꿈을 찾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 고등학교 졸업 후 꼬박 10년 동안 쉬지 않고 돈을 벌었다. 빛 한 줌 느껴지지 않는 터널 같던 20대에도 하고 싶은 일을 부지런히 찾아 기록하고 실행했다. 좋아하는 일을 할 때 발하는 눈빛, 활기, 행복함과 같은 반짝거림이 좋았다. 그림도 그중 하나였다. 나의 일상이었기에 자각하지 못했을 뿐이다. 장기 여행인 탓에 가방 무게를 줄이려고 옷은 버려도 스케치북과 색연필은 꼭 챙겼다.


여행지를 그림으로 남기는 것은 추억에 각인을 하는 것 같다. 별것 없는 평범한 골목도 그림으로 그리면 특별해진다. 금방 둘러보고 이동했을 자리에 서서 건물 위로 세월이 그은 선까지 그리고 있으면 어느새 해가 지기도 한다. 그렇게 그린 그림을 다시 들춰볼 때면 그날의 공기나 냄새, 분위기까지 생생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여행이 끝나고 계절이 두 번이나 바뀐 오늘도 그림을 그린다. 아마도 나의 여행은 그림이란 꿈을 만나기 위해서였나.



SRT 매거진 3월호


My Travel Note는 각기 다른 직업을 가진 타인의 여행 이야기를 들어보며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여행을 꿈꿔보는 코너입니다. 일러스트레이터의 세계여행을 주제로 글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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