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태와 세계여행을 떠날 땐 "결혼도 안 한 남녀가 어찌 장기 여행이냐, 결혼을 하고 가라"라는 말을 그렇게 많이 들었는데 식을 올리고 나니 새로운 오지랖이 시작됐다. 애, 애, 애. 그놈의 애 소리를 이렇게 많이 들을 줄이야!
그 시작은 회사 실장님이었다. 실장님은 내가 결혼 휴가를 다녀온 다음 날부터 '애 소리'를 시작했다.
"애는 엄마가 젊을 때 낳아야 좋은데."
"애는 하나보단 둘이 나은데."
"그러려면 빨리 낳아야지."
처음엔 그러려니 하고 말았다. 그러다 애 낳으라는 소리를 너무 자주, 대놓고 해서 아직은 생각이 없다고 에둘러서 말했다.
"아기 좋죠. 예쁘고. 그런데 동생이 돌쟁이 아들을 키우고 있는데 아기를 낳기 전과 후의 삶이 너무 달라져서 제가 그만큼 포기하고 희생할 자신이 지금은 없네요. 그리고 세계여행도 한 번 더 가고 싶어서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그러나 실장님은 포기하지 않았다. 수차례 내가 둥근 거절을 했음에도 실장님은 틈만 나면 애 낳으라 소리를 해댔다. 자식이 얼마나 예쁜지, 자식을 보고 산다느니, 남편보다 자식이 최고라는 말을 말이다.
하루는 실장님과 함께 스타벅스 샌드위치를 하나씩 집에 사간 적이 있다. 다음날, 샌드위치가 맛있었다며 실장님이 말을 꺼냈다. 자기는 안 먹겠다고 아이들을 줬는데 (실장님은 원래 샌드위치를 엄청 좋아한다) 애들이 한 입 먹어보라고 자기를 챙겨줬다길래,
아 그래요? 저는 안 먹어서 맛있는지 몰랐는데 다음에 먹어봐야겠네요, 어제는 신랑 다 먹으라고 줘서요. (나는 그때 배가 안 고팠고, 저녁으로 삼겹살을 구워 먹을 계획이었다. 샌드위치는 신랑의 최애였고, 나는 삼겹살을 더 좋아했다. 그래서 안 먹은 건데)
그거 보라고, 역시 남편은 그렇다고. 애를 낳아야 한다고!
한순간 남편 때문에 먹고 싶은 것도 다 참는 사람이 되었다. 삼겹살을 먹고 싶어서 일부러 안 먹었다는 변명을 실장님에게 하던 내 모습이란.
한 번은 실장님이 이런 말을 했다.
"나이 들면 남편 하나만 보고는 못 살아요~"
내내 참아왔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한계에 다다랐다. 식 올린 지 겨우 열흘 차에 이런 얘기 들어야 하나? 신랑과 나, 지금도 둘이서 충분한 하루를 보내고 있는데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며 무조건 애를 낳아야 하나?
"그건 사람마다 다른 거니까요. 남편 보고 잘 살아 볼게요."
순간 정적이 흘렀다. 어색한 분위기를 나서서 풀지 않았다. 여태까지 윗사람이라서 둥글게 둥글게 그만 좀 하시라는 메시지를 보냈었는데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실장님이 답답하고 짜증 났다.
하루는 실장님이 유통기한 지난 편의점 도시락을 점심으로 가져왔다. 웬 거냐고 물으니 애들 먹으라고 사다 놨는데 아무도 안 먹어서 자기가 해치워야 한다고 했다. 애들은 먹지 말라고, 버리라고 그랬는데 아까워서 가져왔다고.
뭐 나도 가끔 유통기한 지난 음식 먹는다. 그건 그럴 수 있다. 다만 애들 없이 못 산다고, 남편만 보고는 못 산다고 말하던 사람이, 애 낳으라고, 낳으라고 수없이 나를 까던 사람이 애들이 안 먹어서 유통기한 지난 편의점 도시락을 먹는 사실이 새삼 행복하게 보이지 않았다.
나, 애들 좋아한다. 유치원, 어린이집, 영어놀이학교 선생님을 오래 할 수 있었던 이유도 애들이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직 애 낳아야지, 말아야지 그런 결정을 내리진 못했다. 어떤 선택을 하든 감수해야 하고 책임져야 할 것들이 너무 무겁고 돌이킬 수 없어서이다. 그건 지태도 마찬가지다. 자주 미래에 대하여, 2세에 대하여 이야기하지만 단 한 번도 어떤 결론에 다다르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은 신혼을 즐기기로 했다. 언젠가 결정을 내리겠지만, 일단은 그 때를 미루기로 했다. 그런데 잠깐 만나는 사람들이 나의 인생에 왜 이렇게 관심이 많은지. 비단 실장님뿐만 아니다. 미용실 사장님도 그랬다.
몇 년째 단골 미용실 사장님이 있다. 내가 지태의 머리를 잘라주는 걸 알고 미용 방법을 알려주기도 하고, 결혼 선물이라며 샴푸를 선물로 주기도 했다. 친절하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다. 심지어 실력도 대단하다! 완벽한 헤어 디자이너라고 볼 수 있다. 딱 한 가지만 뺀다면.
사장님은 어느 날 말했다. 자신의 인생을 후회한다고. 특히 자식을 낳은 것을 후회한다고. 무슨 말이 위로가 되겠는가. 나는 파마를 하는 몇 시간 내내 잠잠히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사장님은 언제나처럼 자신의 이야기 말미에 이런 말을 덧붙였다.
"애 낳지 마요. 지옥이야. 애는 정말 낳으면 안 돼. 인생 망치는 거야."
며칠 전에도 그랬다. 지태 머리를 자르러 갔는데, 사장님이 불쑥 말을 꺼냈다. 이제 애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말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또 시작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애 낳지 말라는 말을 미용실에 올 때마다 들었던 터라 그날은 짜증이 먼저 났다.
"아 그런데요, 제가 저번 달에 결혼하고서 스트레스를 너무 받아요. 사람들이 애 낳으라는 소리를 얼마나 하는지. 저희는 방금 결혼해서 아직 아무 생각도 없거든요. 일단 둘이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이 정도면 알아 들었겠지, 싶었는데 아니었다. 사장님은 못 알아 들었다.
"애 낳지 마요. 애 낳는 순간 끝이야 끝! 지옥이야. 나 봐, 나 이렇게 살잖아. 진짜 애 낳으면 안 된다니까? 우리 큰 고모가 진짜 잘했어. 큰 고모가 결혼해서 시댁이 애 낳으라고~ 낳으라고~ 그랬는데 큰 고모가 애 낳겠다고 말만 하고 오랫동안 피임약을 먹은 거야. 아무도 몰래. 그렇게 해야 돼. 그래서 그 집은 애가 없잖아."
하.. 내가 왜 남의 집 피임약 먹은 이야기까지 듣고 있어야 되나. 중간중간 그만 좀 하시라는 뉘앙스의 말로 대화를 차단했지만 사장님은 하던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나와 지태는,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다른 손님들은 얼굴도 모르는 여자의 피임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애 낳으면 여자가 손해야. 몸도 얼마나 망가지는데. 그리고 키워봤자 다 소용없어. 다 지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지. 그니까 애 낳지 마요. 절대 절대. 나 인생 후회하잖아. 애 낳은 거 진짜 후회하잖아."
사람마다 자기가 살아온 인생이, 자기가 만나본 사람이 전부인 줄 알고 산다. 나도 은연중에 그럴 수 있다. 남자들은 다 이럴 거야라든지, 시댁은 다 이럴 거야 하는 결론을 내려놓고 달리 존재하는 인생을 부정할 수 있다. 내가 살아온 인생이 정답이라고 믿으니 타인에게 하는 충고와 조언이 모두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누군가에겐 그 충고와 조언이 가치 있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틀렸다는 게 아니다. 그러나 내 딴에 조언이라고 했던 말이 상대에게 불편하게 들렸을 수도 있다.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말이다. 그러니 상대가 조금이라도 불편한 기색을 보일 때 멈출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우리는 모두 자기만의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내 세상이 존중받길 원하는 만큼 너의 세상도 인정해 주어야 한다. 아, 저와 생각이 다르시네요. 당신의 인생을 응원합니다. 정도에서 끝나야 한다.
시간이 지나 애를 낳을 수도 있고, 딩크족으로 살자고 결정할 수도 있다. 어떤 선택이든 상관없다. 오롯이 나와 지태의 의견으로만 내리고 싶고, 또 그래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일단 행복하기로 결정.
2021년 7월. 출산과 딩크, 그 사이 어디쯤에서.